원격 회의시스템이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끼리 거리 제약을 해결해주는 매우 유용한 시스템이다.
서울에서 30분 발표가 있으면 지방에 있는 사람은 이를 위해 기차 안에서 왕복 다섯 시간, 서울 지하철이나 택시에서 한 시간, 기다리고 준비하는 시간까지 대략 여덟 시간을 소비해야 한다. 원격 회의시스템을 이용하면 시간도 절약되고 동영상도 고스란히 확보돼 좋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잘 안 된다.

매년 국정감사를 보면 주요 부서의 책임자급이 총동원돼 혹시나 모를 질문에 대비하느라 발표장 근처를 서성이고 있다. 참 딱하다. 원격회의 시스템이 안 되는 이유는 정치력 불균형에 있다. 예를 들어 원격시스템을 통해서 과학적으로 평가받겠다고 할 정도로 간 큰 기관은 별로 없다. 평가받는 주제에 감히 원격시스템에 앉아서 거저 먹으려 한다는 식의 원성을 살 가능성이 높다. 평가기관이 원격으로 하자고 권유해도 `찍히지 않기` 위해서 직접 찾아가 보고를 올리는 것이 슬기로운 행동이란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정치가 과학과 합리를 이기고 있는 장면이다.
정치도 과학연구 활동만큼이나 중요하다. 현대과학은 아르키메데스나 뉴턴 시대와 달리 집에서 쇠붙이나 실험도구를 만들어 할 수 없는 구조다. 장독대를 들어내고 반지름 2m 가속기를 혼자 만들 수는 없다. 굴뚝을 털어내 가정용 원자로를 만들 수 없으며 집 안 어떤 도구를 사용해도 유전체 서열은 읽을 수 없다.
현대 모든 과학자와 기술자는 공공기관을 통해 상당한 자금을 지원받아야 한다. 한정된 자원으로 어떤 분야에 지원해주다 보니 가치문제에는 정치가 동원될 수밖에 없다. 재원을 A분야나 B분야 한 곳에 몰아줄 것인지, 아니면 공평하게 배분할 것인지는 사회적 상황과 해당 분야 과학자의 정치력과 타협의 결과로 도출될 수밖에 없다.
해외에서도 각 분야에서 자신이 속한 분야 연구예산을 더 받아내기 위해서 엄청난 경쟁을 한다. 그러나 이 경쟁 과정에서 정치가 과학을 타고 앉아 과학 외 기준으로 줄을 세우면 로봇 물고기가 다시 재연될 수밖에 없다. KAIST 총장사태에서 보여준 고소 고발, 시간 끌기, 심지어는 반대세력에 대한 이념공세는 정치가 과학을 누르려고 할 때 나타나는 모든 과정을 빠짐없이 보여준 진귀한 연구용 재료가 아닌가 한다.
융합연구에도 이와 비슷한 정치 문제가 들어 있다. 각종 유인책을 동원해 융합연구를 지원하지만 실제로 그 속을 들여다보면 허술한 부분이 많다. 서로 부족한 면을 메워 주는 협업 연구가 말로는 쉽지만 모든 협동 작업에는 크고 작은 위계 갈등이 존재한다. 연구자는 융합에 있어서 자신은 갑이고 다른 사람은 보조해주는 을로 인식한다. IT 관련 연구자가 느끼는 당혹감이 이런 것들인데, 비(非)IT 연구 쪽 어떤 이들은 IT 쪽 연구자를 데이터나 정리해주고 웹페이지를 관리하는 기술자로 정도로 인식한다. 이러니 연구비 배분에서도 실망할 정도다.
정부 부처 간 칸막이 제거가 잘 안 되는 이유도 이런 영역싸움에서 정치적 욕심이 앞서서다. 과학 순위가 해당 분야 책임자의 정치력 순서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정치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정치가 과학의 좋은 협업자기 되기 위해서는 책임자급 인사가 인간적으로나 학문적으로 현장 연구자의 존경과 신뢰를 받는 사람이 돼야 한다. 정치적 욕심을 달성하기 위해 외피만 과학뿐인 전시성 사업을 탐하는 책임자가 정책을 좌우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불합리와 비논리가 진영논리로 강변되고 있는 정치 현실에서 `과학 한국`을 소망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며 달성 불가능한 희망이다. 일선 연구자가 단돈 1만원이라도 잘못 집행하면 난리가 나지만 기획부터 잘못된 수백억원대 사업은 대마불사의 마법을 이어간다. 일상에서 논리와 과학이 가치 있게 평가 받는다면, 당국자가 그렇게 목을 매는 노벨상은 당연히 따라 올 수밖에 없다.
과학은 잘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이 과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정치가 이 일에 대한 책임이 있다. 등록된 탁구선수만 3000만명인 중국 탁구를 어느 나라가 이길 수 있겠는가 말이다. 과학도 별반 다르지 않다.
조환규 부산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교수 hgcho@pusa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