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통신장비 업체들 입지 갈수록 위축
국산 통신장비 업체들의 입지가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최근 들어 대규모 통신 인프라 구축사업을 해외기업이 줄줄이 독식하면서 우리나라 통신장비산업이 뿌리째 흔들릴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통신 인프라에 속하는 백본장비의 글로벌 경쟁력을 감안하면 국내 통신장비산업의 초라한 현실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백본장비에 이어 가입자단 장비까지 무차별 가격공세의 희생양으로 전락하면서 중소 통신장비 업체들이 고사위기에 내몰렸다.
특히 시스코·에릭슨·주니퍼 등에 이어 화웨이까지 국내 대형 통신시장의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면서 국내 네트워크통합(NI) 업체들을 앞세운 `끼워 팔기` 전략이 더욱 극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면서 국산 통신장비 업체들의 설 땅을 더욱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평가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산업이 장비 국산화로 진정한 세계 최강국으로 거듭났듯이 통신산업의 뿌리인 장비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할 정책적 지원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28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KT는 이달 진행된 농협 통합망 사업에서 전송장비 일종인 다중 서비스 지원 플랫폼(MSPP)을 알카텔-루슨트 장비로 제안했다. 800억원 규모의 전체 사업 중 MSPP 공급량은 약 100억원 수준이다.
국내 업계는 MSPP의 국산 대체가 가능하다는 것과 농협의 공공성을 이유로 국산업체 진입을 꾸준히 요구해왔지만 불발됐다.
중국계 통신장비기업인 화웨이는 LG유플러스가 지난주 진행한 2.6㎓ 신규 LTE망 기지국 구축사업에서 에릭슨LG를 제치고 장비 공급권을 품에 안았다. 중국 업체가 국내 이동통신 기지국 시장에 처음 진입한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인빌딩 중계기 등 통신장비를 공급하던 일부 업체는 물량 축소로 타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통신사업자 측에서는 국내 중계기업체의 참여를 검토하겠다는 방침이지만 국산 통신장비 업계 관계자는 “화웨이가 워낙 좋은 조건을 제시한데다 메트로(기지국)와 인빌딩 중계기 연동 문제 등으로 국산 참여가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스코는 지난해 KT와 장비대여(리스)를 포함한 광범위한 통신장비 물자 공급계약인 일명 `폴라리스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 프로젝트는 통신장비 시장에서 시스코 영향력이 확대돼 진입로가 줄어들 것을 우려한 국내 업계의 반발과 시기상조라는 내부 의견으로 컨설팅 단계에서 무산됐다.
구교광 한국네트워크산업협회 전무는 “폴라리스 프로젝트가 실현됐으면 국내 통신장비 업계의 어려움이 더욱 커졌을 것”이라며 “A부터 Z까지 모든 솔루션을 공급할 수 있는 글로벌업체의 국내 공략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글로벌 업체의 국내 진입이 가속화되면서 정부가 최근 발표한 `ICT 장비산업 육성방안`도 휴지조각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미래창조과학부는 지난 8월 2017년을 목표로 `명품 ICT 장비 22개 품목 육성` 등을 핵심내용으로 한 `ICT장비산업 육성방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국내 시장이 글로벌기업의 각축장으로 재편되면서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약한 국내 업계가 `명품 장비` 개발은커녕 생존조차 힘들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높다.
김철수 인제대 컴퓨터공학부 교수는 “중국과 미국 등 선진시장에서도 자국 ICT 장비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무역을 천명하는 등 치열하고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는 중”이라며 “중소기업 위주의 취약한 우리나라 ICT 장비산업 체질을 고려할 때 단기간에 시장이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 경우 경제적 손실 외에 보안 등 외산 ICT 인프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통신 주권을 상실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김시소기자 sis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