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산 일색 통신장비, ICT 성장 적신호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은 서비스에 국한된 이야기죠. 그 안을 뜯어보면 모두다 외산 인프라입니다.”(국산장비 CEO)
우리나라 ICT 산업 성장엔진에 위험 신호가 켜졌다. 세계 최고의 통신 서비스를 자랑하지만, 서비스가 가능한 인프라는 해외 기업에 모두 의존하고 있다. 연간 2조원 가까운 외화가 비싼 외산 장비 구매로 유출된다. 외산 인프라에 종속된 서비스 강국이 온전한 통신 강국이냐는 자조 섞인 비판도 거세다.
전문가들은 국내 ICT 장비산업의 경쟁력이 취약한 근본 원인을 좁은 내수시장으로 인한 규모의 경쟁력이 어려운 구조적 문제점을 첫손으로 꼽는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 진행된 서비스 중심의 산업 육성 전략이 `뿌리 산업의 싹`마저 잘라 버렸다고 비판한다. 여기에 핵심 기술을 확보한 대기업도 단말 비즈니스에 집중하면서 생태계 맏형의 보호막이 사라졌다는 지적이다. 수익만 추구하는 외산 기업이 한국에 재투자하거나 상생협력을 거의 하지 않으면서 지리멸렬한 중소·벤처 기업은 서서히 시장에서 사라지고 있다.
◇연간 2조원 이상 인프라 투자 해외기업 독차지
ICT장비 시장은 `규모의 경제`가 통하는 대표적인 분야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융합된 솔루션 공급이 필수고 설비, 시공 등 부수적인 산업효과도 크다. 한번 도입되면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이상 해당 지역 통신 인프라를 담당하기 때문에 경제유발 효과를 단순 공급가로 산출하기 어렵다.
글로벌 기업은 예외 없이 개발도상국에 ICT 장비를 저가로 공급하고 영향력을 확대하는 전략을 진행 중이다. 대부분 통신 인프라 구축 사업은 국가 차원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를 하고 이를 회수하는 구조로 사업을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R&D 자금 투입은 물론이고 개발도상국을 테스트베드로 한 시험도 마다하지 않는다.
글로벌 ICT 장비 업체는 연간 수조원대 기업, 통신사업을 국내에서 수주한다. 시스코, 에릭슨, NSN, 알카텔-루슨트, 화웨이 등 주요 업체 매출만 따져도 2조원 이상이다.
개발도상국처럼 저가, 턴키 공급이 만연하지는 않지만 ICT 인프라 구축이 활발한 국내 시장은 글로벌 업체의 좋은 타깃이다.
반면에 외산을 안방을 조금씩 내주면서 우리 기업의 시장경쟁력은 급속히 쇠퇴하고 있다.
일부 자체 기술을 확보한 전송, 교환, 가입자 단 인프라도 선도 업체와는 기술 수준이 한참 뒤떨어져 있다. 차세대 통신기술 집약체로 평가받는 무선 분야에서는 삼성전자 이외 핵심기술을 보유한 업체가 전무하다.
소프트웨어정의네트워크(SDN) 등 이미 상용화가 시작된 첨단·미래기술은 막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대기업은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관련 사업을 포기한지 오래다.
국산 장비업체 한 CEO는 “글로벌 기업의 가장 큰 문제는 국내 산업 생태계에 재투자하거나 상생협력에 적극적이지 않은 점”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LTE 구축 시점에 즈음해 글로벌 이동통신기지국 업체와 국내 중계기 업체의 동반상생 전략 등이 마련됐지만 특수 규격 개방 등 후속조치가 미흡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서비스 중심주의`가 오히려 부메랑
통신 장비시장이 방치된 것은 화려한 서비스 중심의 통신시장 활성화 전략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는 지적이 높다. ICT 시장 진입 초기만 해도 독자 개발한 전전자교환기(TDX),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CDMA 등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지만 이후 인터넷 통신 시장이 급격히 커지며 국내 업체들이 미처 내실을 키울 기회를 잡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국책 개발과제에 20여년 참여해 온 정보통신 관련 한 대학교수는 “2000년대에 들어 통신·인터넷 서비스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국산 개발을 기다리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며 “시장 경쟁이 치열해지며 통신사들이 당장 상용 서비스가 가능한 글로벌 업체 외산 장비를 도입해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국내 업체들이 설 자리가 줄어든 것”이라고 분석했다.
대형 통신 관련 국책과제가 줄어든 것도 원인 중 하나다. TDX, CDMA 등 조 단위 국가 자본이 투입된 대형 연구개발(R&D)가 실종되며 주변 생태계도 활동을 멈췄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관계자는 “2000년 이후 기존의 연구성과와 더불어 서비스 시장이 확대되며 우리나라가 ICT에서 앞서나간다는 착시 현상이 팽배했다”며 “추격형 R&D로 어느 정도 기술 수준까지는 도달했으나 그 이상 치고 나가지 못하며 벌어진 격차가 부메랑이 돼 돌아 온 것”이라고 진단했다.
◇대기업은 핵심기술 확보하고도 역할 못해
기업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삼성전자의 경우 1990년대 후반 이미 유선망 핵심으로 꼽히는 라우터(서로 다른 네트워크를 조정하는 장비. 패킷 전송 경로를 지정하는 등 유선 핵심 장비로 꼽힌다)기술을 확보했지만 2~3년 공급 이후 물량 생산을 중단했다. 가전, 단말, 무선 등 이익이 많이 남는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대기업이 생태계에서 빠지면서 국내 라우터 시장은 외산이 점령했다. 최근 군이 추진 중인 전술정보통신체계(TICN) 사업에서 국내 중소기업 연합군이 라우터 공급을 추진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군, 정보기관, 정부 등 민감한 정보가 오가는 국가 기간망은 예외없이 외산 라우터에 물려 움직인다. 국내 통신사가 망을 운용하지만 장애 등 리스크가 생길 때는 글로벌 공급업체 손을 빌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동통신망도 예외가 아니다. 국내 이동통신 기지국 공급 레퍼런스를 가진 업체는 삼성전자를 제외하면 에릭슨, NSN, 알카텔루슨트, 화웨이 등 외산 일색이다. 통신사는 통상 위험 분산과 공급가 유지를 위해 2~3개의 복수 기지국 업체를 선정하는데 적게는 50%에서 많게는 70%까지 외산 공급사가 물량을 수주해간다.
김시소기자 sis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