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길 먼 공공정보화 사업 선진화
정부는 최근 몇 년간 공공정보화 분야의 후진적 사업관행을 없애고 품질을 높이기 위해 대대적인 개선방안을 제시했다. 대표적인 개선과제가 공공정보화 사업 상세 제안요청서(RFP) 작성, 원격지 개발 확산, 성과 중심의 대가체계 도입 등이다. 상세 RFP 제도는 법적 근거까지 마련됐지만 여전히 한계가 많다. 정부가 추진하는 공공정보화 사업 품질 제고를 위한 정책들을 집중 분석했다.
현재 상세 RFP 제도는 개정 소프트웨어(SW)산업진흥법 시행으로 법적 의무화까지 됐지만, 여전히 선진국 대비 RFP 내용은 빈약하다. 공공 정보화 사업 대가체계도 보다 현실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정부 고시를 폐지하고 민간에 이양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원격지 개발은 옛 행정안전부 내에서 태스크포스(TF) 단위로 연구되다 대기업 참여제한이 이뤄지면서 유야무야 됐다.
◇상세 RFP 법적 근거 마련 불구 확산 안돼
공공정보화 상세 RFP 제도는 지난 2010년부터 일부 공공기관 대상으로 시범적용이 이뤄진 후 SW산업진흥법 개정으로 올해 1월부터 의무화됐다. 그러나 일부 대형 사업을 제외하고는 상세 RFP 작성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조달청 나라장터 사이트에 게재되는 공공기관의 정보시스템 구축 사업 RFP 중 기술요구 사항은 20~30페이지에 불과하다. 상세 RFP를 작성했다는 일부 대형 사업도 충분하지는 않다.
160억원 규모로 상세 RFP를 작성한 대표적 공공정보화 사업인 한국고용정보원의 차세대 고용정보시스템 구축 RFP도 사업 전 영역에 대한 제안요청 내용은 40페이지에 불과하다. 그나마 이 중 상당 부분은 하드웨어(HW)나 SW 제품 성능 요구사항이다. 실제로 시스템통합(SI) 등 과업 내용은 많지 않다. 기술 요구사항만 최소 50페이지에서 많게는 200페이지에 이르는 선진국의 RFP에 비하면 매우 적은 분량이다.
공공정보화 사업의 고질적 문제인 과업변경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시스템 개발과정에서 요구사항이 변경되거나 새로 추가돼 프로젝트가 지연되는 문제가 수시로 발생한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개발자들의 근로여건도 악화된다. 불명확한 요구사항으로 낮은 사업금액 책정에 따른 수행업체의 재정적 어려움도 나타난다. 늘어나는 요구사항으로 사업을 수주하고도 적자를 겪게 되고 결국 사업 품질 저하로 이어진다.
상세 RFP가 법적으로 의무화됐지만, 확산되지 못한 이유는 제재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개정 SW산업진흥법과 고시인 `SW사업관리감독에 관한 일반기준`에 공공기관은 정보시스템 구축 사업 발주 시 세부적인 요구사항을 공개하도록 돼 있지만 어겼을 때 받는 제재는 명시돼 있지 않다.
상세 RFP 작성을 위한 공공기관 역량 부족도 원인이다. 대형 공공기관을 제외하고는 한 두 명이 여러 사업을 맡기 때문에 상세 RFP 작성이 어렵다. 상세 RFP 제도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담당자도 많다.
미래창조과학부 관계자는 “올해 관련법이 시행돼 아직은 미흡한 점이 많다”며 “향후 모니터링 등을 강화해 상세 RFP 작성을 확산하겠다”고 말했다.
◇성과에 따른 정보화 사업대가 도입해야
성과에 따른 정보화 사업 대가 체계가 마련되지 못한 것도 문제다. 정부는 앞서 기존 SW 대가 기준인 고시를 폐지하고 민간에 이양했다. 정부 고시가 정보화 현장을 적절하게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민간 이양 이유다.
정보화 사업에는 프로젝트관리(PM), 프로젝트리더(PL), 아키텍처, 분석설계, 데이터베이스(DB), 보안, 네트워크 등 역할이 분업화 돼 있어 보상체계가 각기 다르다. 동일 영역이라도 개발 언어에 따라 인건비가 차이가 난다. 초·중·고급으로 단순 분류하는 정부 고시로는 적절한 사업 대가를 책정하기 힘들다.
민간에 이양된 이후에도 공공정보화 사업의 대가체계는 여전히 초·중·고급의 인력 투입 기준이 적용되고 있다. 민간 이양된 SW 노임단가를 관리하는 한국SW산업협회가 단가체계를 변경하는 것은 쉽지 않다. SW 노임단가 정부 고시 폐지로 정부 책임만 사라진 셈이다.
노임단가 체계가 초·중·고급으로 단순 분류됨에 따라 기업들의 고급인력 투입을 기피하는 현상도 나타난다. 고급인력이 수행해야 하는 작업에도 외부 협력업체나 프리랜스 인력 채용 시 중급으로 공고를 내는 경우가 많다. 개발자의 낮은 급여와 프로젝트의 품질 저하가 우려된다.
공공정보화 사업에 참여한 한 개발자는 “중급 개발자 채용공고를 낸 후 실질적으로는 고급경력을 가진 개발자를 채용, 중급의 급여를 주면서 고급 업무를 요구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IT서비스기업 공공정보화 사업 관계자는 “당초 사업 수주금액이 낮아서, 현실적으로 중급의 인건비로 고급의 업무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인력 투입에 따른 대가체계가 개선되지 않는 한 이러한 문제는 해결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사업비용 절감위해 원격지 개발 도입 필요
공공정보화 사업의 원격지 개발 논의는 아예 유야무야 됐다. 공공정보화 사업과 SW산업을 각각 담당하는 주무부처인 안전행정부와 미래창조과학부 모두 현재는 원격지 개발 제도 도입을 논의하지 않는다.
상당수 공공 정보화 사업은 발주기관 인근에서 이뤄진다. 원격지 개발이 이뤄지지 않아 사업 수행업체들은 발주기관 인근에 사무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발주기관이 지방에 위치한 경우에는 지방 체류비 등으로 추가 비용이 발생된다.
한국IT서비스산업협회 조사 결과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전자정부지원사업에서 사업자가 부담한 공간 임차료는 계약 금액의 4.32%에 해당된다. IT서비스기업이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이 6.83%인 점을 감안하면 임차료 비중은 상당히 큰 셈이다.
향후 공공기관들의 지방이전이 확대되면 수행업체의 사업비용은 더욱 늘어난다. 중견 IT서비스기업 관계자는 “원격지 개발이 도입되지 않으면 발주처 인근 사업장 설치에 많은 비용을 계속 투입해야 한다”며 “이는 사업의 품질 저하로 연결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개발자의 근로여건을 악화시키는 원인이기도 한다. 발주자 인근 작업장 설치로 공공정보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개발자의 4분의 1은 출퇴근이 불가능한 작업장에서 합숙을 하고 있다. 지방 이전으로 이 비율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안전행정부 관계자는 “공공정보화 사업의 원격지 개발 논의는 아이디어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는 정도”라고 전했다.
신혜권기자 hksh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