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진공기술 연구개발(R&D)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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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계에서 진공은 청정한 환경을 제공한다. 화학 물질을 반응시킬 때 정밀하게 조절할 수 있고 단열 효과도 있다. 플라즈마도 안정적으로 분산시킬 수 있다. 산업이 고도화, 첨단화될수록 진공 상태에서 제어해야 하는 공정이 많아진다.

진공업계의 화두는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진공을 쉽게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다. 현재 진공기술이 가장 활발하게 적용되는 분야는 박막판 증착 공정이다. 박막판 증착 방법은 다양하지만 대부분 진공 상태에서 진행된다. 반도체와 TFT 디스플레이의 필수 공정이고, 한 공정 내에서 여러 번 반복되기 때문에 제품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우리나라 삼성전자, 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와 IBM, 마이크론, BOE, 샤프 등 해외 유수 기업은 진공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시설과 장비를 갖추기 위해 막대한 금액을 투자하고, 이후 유지보수에도 투입한다.

최근 첨단공정에서 다루는 물질이 나노 단위로 작아지면서 보다 더 청정한 초고진공 환경이 필요하게 됐다. 초고진공 환경을 구축하려면 요소 부품의 성능이 향상돼야 한다. 요소 부품은 밀봉 장치, 진공펌프, 진공배관 등 다양하다. 한 설비 내에서 금액 기준으로 개별 부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고성능·고신뢰성을 요한다.

예를 들어, 밀봉장치에 문제가 생기면 진공 상태를 유지할 수 없어 해당 공정을 모두 멈춰야 한다. 반도체 증착 공정이라면 웨이퍼를 전량 폐기해야 하고 보수를 위해 장비 가동을 중단해야 한다. 부품 하나 때문에 제조비용이 증가하고 납기가 늘어나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장당 제조 단가가 높은 TFT 디스플레이 산업은 반도체 공정에 비해 더 심각한 손실을 입을 수 있다. 제품 생산 수율에도 진공 설비의 성능이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이런 진공관련 설비에 사용되는 대다수의 부품이 수입산이거나 해외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공펌프, 진공배관, 진공밸브, 진공을 유지하기 위한 실링 제품(Static Seal), 심지어 진공 그리스의 소모품도 그렇다. 진공을 측정하는 진공계, 누설시험장치 등 계측장비도 마찬가지다. 특히 고정밀·고신뢰성을 요하는 제품일수록 외산 의존도가 높다. 국내 업체들이 시장 진입을 노리고 있지만 대부분 영세하고 연구시설이 미비해 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산 장비·부품을 사용하면 예방 정비 횟수가 외산보다 보통 두 배나 많아진다. 해외는 물론이고 국내 고객조차 신뢰성에 의구심을 갖고 제품 채택을 미루는 경향이 있어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국산화를 위해 요소기술 업체가 연구개발(R&D)을 담당해야 하지만 중소기업으로서 이 비용을 부담하기는 쉽지 않다.

어려운 환경이지만 국내 진공기술 업체들이 그나마 현 위치에 오기까지 쏟은 노력은 적지 않다. 30년가량 R&D에 힘써 양산에 성공한 소모품 부품도 있다. 국산화에 성공했더라도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지속적인 R&D가 필요하지만 글로벌 업체들과 경쟁하기에는 투자 규모가 턱없이 적다.

진공기술은 신약개발, 핵융합, 정밀 계측, 항공·우주 등 미래 산업에 꼭 필요한 기술이지만 국내 수준은 선진국과 견줘 차이가 많이 난다. 이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는 국가 R&D 정책의 우선 순위가 완제품보다는 소재부품 분야로 바뀌어야 한다. 수요기업인 대기업과 가교 역할도 필요하다.

언제까지나 외국기술에 의존하면서 막대한 국부가 외국기업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김윤호 한국씰마스터 사장 yhkim@ks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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