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5 정전사고가 발생한지 두 해가 다 돼가도록 전력난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발전설비 확충은 여전히 어렵고 노후설비 가동률 상승으로 발전소 고장률까지 높아지면서 전력수급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됐다.
이번 여름이 지나도 상황은 쉽게 개선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동절기 전력수요가 하절기 수요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과거 블랙아웃 위협이 여름철에 있었다면 이제는 연중 대정전의 불안에 시달리게 됐다. 전력난 극복을 위한 최선의 조치로 수요관리 정책의 필요성이 대두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전력, 가스, 열 등 에너지원별 통합 수요관리로 전력수요를 억제하고 절감효과를 정밀하게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지만 우리는 여전히 과거 정책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세계는 지금 효율 향상에 주목
지난해 10월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에서는 예고 없는 블랙아웃으로 5300만명이 불편함을 겪었고 칠레는 블랙아웃으로 발생한 치안공백을 틈타 약탈 등 범죄가 급증했다.
앞서 지난 2000년, 2001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전력수요 증가와 송전선 부족으로 다섯 차례나 블랙아웃을 겪었으며 2003년 뉴욕과 뉴저지 등 동북부 8개 주도 광범위한 정전 피해를 입었다. 당시 피해 추산금액은 100억달러로 블랙아웃은 우리 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안겨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했다.
블랙아웃의 원인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에너지 효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2차 에너지인 전기 소비 증가가 근본 원인이다.
때문에 가스, 열 등 전기와 상호 보완관계를 이루는 에너지원을 포함한 수요관리 정책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으며 세계 각국이 에너지믹스를 고려한 수요관리 정책을 도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발전소 등 에너지 생산설비를 늘리거나 불편을 감수하며 강압적으로 전력소비를 줄이는 방식보다 에너지 소비 효율화를 유도하는 정책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판단에서다.
부하관리 사업은 일시적 조치로 예산이 소멸되면 더이상 사업을 추진할 수 없는데 반해 효율향상 사업은 한번 투자하면 기기수명이 다할 때까지 에너지절감과 피크 억제효과를 얻을 수 있다. 효율향상을 통한 에너지절감은 일반적으로 공급 확대에 비해 최대 다섯 배가량 비용 대비 투자효과가 높은 것으로 분석된다.
효율향상 분야에서 이슈는 단연 효율향상 의무제도(EERS:Energy Efficiency Resource Standard)다. EERS는 2000년대 들어 미국,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에서 수요관리 강화를 위해 도입한 제도다. 에너지공급자에게 에너지 절감목표를 부여함으로써 소비자의 에너지 이용효율을 높이는 것이 핵심이다. 절감목표는 에너지 판매량의 일정비율로 지정된다. 통상 연간 에너지 판매량의 1% 수준에서 결정된다.
예를 들어 전력, 도시가스, 지역난방 공급사업자는 그해 전력판매 공급 목표량의 1%를 반드시 절감해야 한다. 이들 에너지공급 기업은 전력, 가스를 사용하는 기기 교체 등 소비자의 에너지효율 향상을 유도하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
EERS를 처음 도입한 미국 텍사스주는 2001년 전력 공급업체에 소비자 전력수요 증가량을 억제하도록 했다. 2002년에는 예상수요 증가량의 5%를 절감하도록 의무화했고 2003년에는 의무량을 10%로 높였다. 캘리포니아주도 2001년 전력위기 사태 이후 EERS를 도입했다. 올해 절감목표량은 총공급량의 10%다. 캘리포니아는 예상 판매량과 실제 판매량 간의 차이를 조정하기 위해 전기요금을 매년 조정하는 이른바 `디커플링`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디커플링 제도는 판매량이 예상보다 적을 때 전력요금을 인상하고 반대 경우에는 요금을 인하해 에너지공급자의 적자를 방지하는 제도다.
영국은 2001년 미국의 EERS와 동일한 에너지효율공약(EEC:Energy Efficiency Commitment)을 제정해 전력·가스 공급업체들에 주택용 에너지효율 향상 목표를 달성하도록 의무화했다. 에너지공급기업은 매 분기 절감결과를 가스전력 시장 규제기관인 OFGEM에 보고한다. OFGEM은 이를 정기적으로 진단하며 샘플 주택조사를 실시해 시행효과를 확인한다. EEC 시행기간 첫 해인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당초 목표인 620㎾h를 40%나 뛰어넘는 870㎾h의 전력을 절감하는 실적을 거뒀다.
프랑스도 2005년 에너지법을 개정해 전기와 천연가스, 가정용 연료, 냉난방 공급자를 대상으로 2006년부터 2008년까지 3년간 프랑스 에너지사용량의 1%를 절감하도록 의무화했다. 에너지공급자는 직접 에너지효율 향상 프로그램을 수행할 수도 있다. 고객의 효율향상 사업을 직접 추진하거나 백색증서(White Certificate) 구입으로 의무량을 채운다.
프랑스 정부는 백색증서 판매가격과 증서판매자 리스트를 발행해 백색증서 거래시장을 활성화할 계획이다. 미국 네바다주와 이탈리아도 2005년부터 EERS를 도입하는 등 선진국은 에너지공급자가 직접 수요관리에 참여하도록 제도로 유도하고 있다.
◇국내 EERS는 여전히 숙제
우리나라도 지난 수년간 EERS 도입 논의가 활발했지만 최근 우선순위가 밀렸다. 심각한 전력난으로 효과가 빠른 부하관리 사업에 투자가 집중됐다.
현재 에너지공급자 위주 수요관리 정책이 추진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EERS와는 크게 다르다. 우리나라는 전기, 가스, 열을 공급하는 사업자가 정부 통제를 받는 공기업이고 요금 또한 자율화되지 않아 EERS 도입이 쉽지 않다. 에너지를 판매하는 사업자에 에너지공급을 억제하는 역할을 부여하면 매출감소, 투자손실 등 불이익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외국처럼 에너지요금을 올려 투자비용 회수, 판매량 감소 손실비용 보전을 위한 디커플링, 목표 성과달성 인증과 거래, 정부기금 마련 등 제도 도입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외국은 EERS 실행으로 얻는 혜택을 소비자에게 직접 지원하는 보조금 제도를 활성화하고 이에 필요한 재원도 소비자가 부담해 기금을 조성하는 구조를 구축했다.
에너지공급자가 아닌 EERS 운영실적을 검증·평가할 수 있는 독립기관의 설립 필요성도 대두된다. 에너지공급자에 효율향상 의무를 부과하고 그 성과의 검증과 운영은 반드시 제3의 전문기관이 주관해야 선수가 심판 역할까지 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수요관리 ICT로 전문성 강화
EERS 등 수요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에너지원별 수요예측과 에너지 절감량의 정확한 측정체계를 구축하는 것도 필수다.
에너지원별 정확한 수요예측을 근거로 에너지절감량을 산정하고 그 성과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수요관리사업의 핵심이다.
최근 정부가 ICT 기능을 도입해 에너지수요예측·절감량을 측정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지금까지 단위설비 위주의 효율향상 기기 보급사업에 주력했다면 이제는 ICT를 반영한 에너지효율관리 시스템으로 수요관리사업의 프레임을 전환하겠다는 의미다.
ICT는 에너지절감량 측정·검증(M&V) 능력을 높인다. 특히 개별 점포, 공장, 건물 등 현재 에너지관리 사각지대에 놓인 소규모 사업장의 관리가 가능하기 때문에 향후 스마트그리드 도입 기반을 제공할 수 있다.
에너지절감 효과도 충분하다. 에너지관리공단에 따르면 단일기기 보급을 통한 효율향상 사업보다 에너지관리 시스템 보급을 통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에너지절약 효과가 3배 이상 높다.
정부가 추진하는 `IT 기반 ESCO 사업` 성과를 분석한 결과 IT 기능을 접목한 에너지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면 연간 평균 7~10%의 전력절감이 가능한 것으로 입증됐다.
과제도 산적해 있다. 통신장비·전력량계 부문 기술은 국내기업이 확보했지만 산업용 특수 센서, 유량계, 제어기기 기술, 데이터 분석·제어 알고리즘은 외국기업 의존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나 국내 기술 자립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최호기자 snoop@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