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훈의 디지털 확대경]독설이라도 맘껏 해줬으면

일본에서는 6월과 11월이면 과학계의 성토 대상이 되는 인물이 있다. 40대 중반 여성 정치인 렌호(蓮舫)다. 그는 2009년 일본 민주당 정권 시절 행정쇄신상을 맡으며 `사업구분`을 진두지휘한 스타 정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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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구분은 정부 추진사업 관련 공무원을 사업 배경과 목적을 재점검하고, 예산 중복 및 낭비 요소를 조목조목 따져 묻는 사실상 청문회다. 과용예산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사안에 따라선 현장에서 바로 메스가 가해지니 이를 지켜보는 국민은 속이 시원하다.

2009년 11월 사업구분에서 렌호는 명언(?)을 남겼다. “2위하면 안 되는 겁니까?” 나라 경제가 어려운 마당에 슈퍼컴퓨터 1위 국가가 되려는 명분 때문에 1조5000억원이나 되는 돈을 쏟아부을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슈퍼컴퓨터의 효용성을 알 리 없는 국민들은 그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세계 1위가 된다고 당장 생활형편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는 일약 민주당의 간판스타가 됐다. 오늘날 민주당은 자민당에 정권을 내준 후 좌초 위기를 겪고 있어도 그의 인기는 변함없다. 최근에는 당 재건을 도울 잔 다르크라 평가될 정도다.

렌호의 `2위 발언`은 국민을 속 시원케 한 `명언`으로 인식될지언정 과학인들 사이에선 `독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가 6월과 11월에 성토 대상인 이유는 이 시기에 세계 슈퍼컴퓨터 순위가 발표되기 때문이다. 슈퍼컴퓨터 국가 순위에서 일본의 순위가 올라도, 반대로 하락해도 그를 향한 과학계의 시선은 차갑다.

2011년 일본이 7년 만에 세계 슈퍼컴퓨터 1위를 재탈환하자 과학인들은 “슈퍼컴퓨터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면 이런 성과는 없었다”며 그를 성토했다. 지난해 일본이 슈퍼컴퓨터 순위 2위로 내려앉았을 때나, 지난주 발표된 6월 순위에서 중국과 미국에 밀려 4위가 추락했을 때도 그는 과학계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렌호의 그 한마디는 일본 과학계를 뭉치게 한 결과를 낳았다. 또 단합된 힘으로 슈퍼컴퓨터 민관 공동프로젝트를 큰 무리 없이 진행하게 했으니 `독`이 아닌 `약`이 된 셈이다. 아베 신조 총리가 취임 후 세계 1위 탈환의 주역인 슈퍼컴퓨터 `케이(京)` 활용현장을 둘러보며 “역시 세계 제일을 목표로 지향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말한 것에도 분명 그의 말이 영향을 미쳤다.

지난달 일본 정부는 1위 재탈환을 위해 케이보다 100배 빠른 엑사급 슈퍼컴퓨터를 개발하겠다고 선언했다. 1000억엔(약 1조1800억원)이 투입된다. 대조적으로 2010년 세계 15위에서 2011년 20위, 2012년 55위, 올해 6월 91위로 급전직하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놀랄 만큼 태연하다. IT강국이라 자부하면서도 추락하는 슈퍼컴퓨터 순위에는 이상할 정도로 관대하다.

과감한 연구개발(R&D) 예산 책정은커녕 슈퍼컴퓨터 R&D 분위기를 고조시킬 만한 변변한 대형 프로젝트 하나 없고, 우리 과학인들을 자극할 만한 독설조차도 없다. 부끄러운 IT강국의 초상이다.

누군가 독설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분통해서라도 과학인들이 똘똘 뭉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독설 말이다. 독설의 수위는 “슈퍼컴퓨터가 밥 먹여 주느냐? 91위면 어떠냐? 지금도 불편함이 전혀 없고 우리가 누리는 IT강국의 위상은 변함없지 않느냐?” 정도면 참 좋겠다.


최정훈 정보산업총괄 부국장 jhchoi@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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