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129>정통부 전성시대

1998년 5월 어느 날.

정부 공공 부문 구조개혁을 책임진 진념 기획예산위원장이 배순훈 정보통신부 장관과 만났다.

“전국 우체국 인력 15%가량을 감축해야 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민간은 지금 구조조정이 한창입니다. 정부도 구조조정을 해야 합니다.”

“인위적으로 인력을 줄일 게 아니라 일을 지금보다 30% 더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지금보다 어떻게 30% 일을 더 하겠습니까.”

배 장관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우체국에서 우표를 더 팔아서라도 수익을 내겠습니다. 사업을 확대하면 됩니다.”

“가능합니까.”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전국체신노동조합(현 전국우정노동조합)이 있는데 일방적으로 인력을 15%나 줄일 수 있습니까.”

진념 기획예산위원장은 정통 경제관료로 동력자원부 장관을 거쳐 김영삼 정부 노동부 장관으로 2년 3개월간 재직하면서 노동법 합의 처리와 노사 상생의 신노사문화 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1997년 11월 부도유예 협약 대상인 기아그룹 회장으로 취임해 무보수로 기아 살리기에 헌신했다. 그는 노조와 자주 소줏집에서 만나 격의 없이 대화하면서 기아 정상화에 지혜를 모았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자 그는 초대 기획예산위원장 제안을 받았다. 그는 김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했다.

진 위원장의 회고록 증언.

“기아자동차 회장인 나는 그런 김 대통령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기아자동차를 살리는 것이 1차 임무기도 했지만 나는 김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바가 없었다. 김 대통령 당선에 공이 있는 사람을 기용하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김 대통령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1998년 3월 기획예산위원장직을 수락했다.

진 위원장과 대우전자 회장 출신인 배 장관은 노조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외환위기를 맞아 사회 분위기가 뒤숭숭한데 우체국 인력 감축에 반발해 전국체신노조가 파업이라도 하면 폭발력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배 장관과 진 위원장은 논의 끝에 “전국 우체국 인력을 줄이지 않고 일을 더해 수익을 더 내자”는 데 합의했다.

배 장관은 이 합의에 따라 우편서비스 개선과 우정사업의 경영혁신을 위한 `오픈 2001 운동` 선포식을 열고 우정사업 다각화를 적극 추진했다.

그해 12월 우정국은 115년 만의 첫 흑자를 냈다(이 운동은 추후 자세하게 소개한다). 정통부는 구조조정이란 위기를 수익 극대화란 기회로 반전시켰다.

배 장관은 이때 정통부 공무원들의 탁월한 업무 능력에 놀랐다고 했다.

배 장관의 증언.

“정통부에 와 보니 우수한 인력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처우는 민간기업에 비해 월등히 낮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애국하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공직자로서 국가에 헌신하는 것이나 민간기업에서 부를 창출하는 것이나 같다`면서 `여러분 중에서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도 애국하는 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배 장관은 4월 7일과 8일 이례적으로 정통부 본부직원 600여명을 대상으로 특별교육을 실시했다. 이에 앞서 3월에 그는 산하기관 직원을 대상으로 특별강의를 했다.

배 장관은 특별교육에서 정통부가 지식정보화를 선도하는 부처인 만큼 이에 걸맞은 정책 마인드를 갖자고 당부했다. 그는 국민 만족 정책 추진과 공직자의 능력 향상으로 자기 분야 세계 일등이 되자고 강조했다.

배 장관은 정책 추진과 관련해 공무원에게 당부한 말은 `왜`였다고 한다. 어떤 일을 할 때 최소한 세 번 이상 `왜`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라는 것이었다.

배 장관의 회고.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를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과 윗사람이 시키니까 무조건 한다는 것은 그 결과가 다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왜 이 일을 하지? 이걸 어떻게 하면 뭐가 좋아지지? 그런데도 왜 지금까지 이 일을 아무도 하지 않았지?`라고 세 번 이상 `왜`를 자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일을 하면 결과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납니다.”

배 장관이 감탄할 정도로 정통부 공무원들의 역량이 뛰어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유능한 행시 출신 사무관들이 앞다퉈 정통부로 몰린 까닭이다. 1994년 말 체신부가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한 이후다. 김영삼 대통령은 당시 `정보화를 국정지표`로 제시했다.

이후 정통부는 매년 행정고시 출신 사무관들이 가장 선호하는 부처로 급부상했다.

1998년 봄 정통부 총무과장이었던 김동수 과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법무법인 광장 고문)의 말.

“김대중 정부 출범 무렵이 가장 절정기라고 봅니다. 미래부서로 정통부가 자리매김하면서 행정고시 사무관이 대거 몰렸습니다. 이들의 성적은 상위권이었어요.”

정통부 첫 외부 인사는 정홍식 차관(한국정보통신사업자 이사장 역임)이다.

그는 국무총리실을 거쳐 권력의 심장부이자 최고 엘리트들의 집합소인 청와대에서 10년간 근무했다.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을 지낸 후 체신부 통신정책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 정통부 발족 이후 정보통신정책실장으로 일하면서 국가정보화와 정보통신산업 육성을 총괄한 산증인이다.

그는 광폭의 대인 관계를 바탕으로 정통부를 일류 부처로 탈바꿈하는 일에 앞장섰다.

초대 경상현 정통부 장관에 이어 이석채 장관(현 KT 회장)은 `정통부가 집행부처에서 정책부처로 변해야 한다`면서 혁신의 바람을 몰고 왔다.

이 장관은 정통부에 소극적이고 배타적인 업무스타일에서 벗어나 발상의 전환을 요구했다.

이 장관의 회고.

“정통부가 출범한 것은 미래에 대비해 제도나 관행을 바꾸라는 주문입니다. 하지만 직원들은 정통부를 경제부처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월례조회에서 정통부는 경제부처라는 인식을 강화하고 거듭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 장관은 정통부에 정보화기획실을 설치해 외부 인력을 대거 수혈했다. 초대 실장에는 안병엽 재정경제원 국민생활국장(정통부 장관, 17대 국회의원 역임, 현 KAIST 석좌교수)을 1급으로 데려왔다. 과장급도 다른 부처에서 영입했다. 안 실장에 이어 변재일 실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민주통합당 정책위 의장) 등이 정통부로 왔다.

이 장관의 후임으로 일 잘하기로 소문난 강봉균 장관(재정경제부 장관, 16·17·18대 국회의원 역임, 현 건전재정포럼 대표)이 취임했다. 그는 `일류 부처` `일등 부처`를 강조했다. 두 사람은 엘리트 경제관료 출신이었다.

강 장관은 “정통부가 일류 부처가 되면 한국 정보화 역시 세계 일류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 장관은 정보통신 정책과 거시경제를 연결시켰다. 정보통신산업 정책을 결정할 때마다 거시경제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해당 국장에게 질문했다. 경제 전체를 보라는 주문이었다.

정통부 출범 후 처음 정통부로 온 사무관은 행정고시 36회다.

1995년 고시 합격자 115명 가운데 20명의 사무관이 정통부로 왔다. 이태희 현 방통위 통신정책기획과장과 최영진 현 정책총괄과장 등이다.

가장 우수한 인력이 몰린 것은 1997년 봄이다.

그해 4월 정통부로 배정받은 행시 출신 사무관은 18명이다. 이 중 37회 행시에서 2등으로 합격한 류제명 현 방통위 규제개혁법무담당관과 38회 행시에서 역시 2등으로 합격한 유법민 현 지식경제부 자원개발전략과장, 39회에서 2등으로 합격한 이맹주 사무관(현 강남대 행정학과 교수)이 포함됐다. 이맹주 사무관은 정통부 근무 중 국비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아 귀국 후 복귀했다가 학교로 이직했다.

39회 출신 사무관은 13명인데 이들도 모두 성적이 상위권에 들었다고 한다. 2등부터 5등까지 모두 정통부에 들어 왔다.

39회 수습사무관 중에 화제의 인물은 송경희 현 방통위 인터넷정책과장이었다.

송 과장은 4남매가 모두 고시에 합격해 `고시집안`으로 주목받았다. 한 사람도 배출하기 어려운 고시에 4남매가 합격했으니 화제가 안 되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송 과장은 39회에서 5등으로 합격했다.

송 과장은 4남 2녀 중 넷째인데 위로 오빠 셋 중 두 사람은 사법고시에 한 사람은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큰 오빠는 대학교수, 둘째는 변호사, 셋째는 민주당 최고위원을 지낸 3선 경력의 송영길 현 인천광역시장이다.

당시 행정고시 사무관은 1·2·3 희망부서를 제출하면 성적순으로 부서 배정을 받았다. 하지만 정통부 지망 사무관들은 성적 우수자들이어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우수 사무관들이 정통부로 몰린 것은 미래부서로 국가 변화를 주도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송경희 과장의 말.

“당시 희망부서는 부서별로 인원편성표가 나오면 성적순으로 배정을 했습니다. 당시 정통부는 새롭게 출범한 미래부서로 시대 변화를 주도했습니다. 국가를 혁신시키는 부처라는 점이 지원한 이유입니다.”

이후 행시 40회에서도 24명이 그리고 41회는 18명이 정통부를 지원했다.

김동수 총무과장의 회고.

“문민정부 출범 무렵이 가장 절정기였습니다. 지원자들이 성적 상위권자였습니다.”

정통부 전성시대가 열렸다. 그러다가 2000년대 중반부터 지원자가 줄었다. 승진이 늦다는 점이었다. 인재가 몰리다 보니 인사가 적체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이유는 일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정통부에서 `ICT 강국 코리아` 건설에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사람이 미래를 만든다는 사실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이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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