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통신정책 최고책임자이자 집행위원회 부의장인 넬리 크로스는 지난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 2013`에서 전시장을 돌아보다 크게 탄식했다. 2000년대 중반, 2세대(G) 휴대폰시장에서 유럽 규격인 GSM 방식이 세계 표준으로 채택됐던 `과거의 영광`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것. 한국, 미국, 중국 기업들이 빠른 속도로 4G LTE 시장을 선점했다. 27개 EU 회원국의 LTE 가입자 수를 모두 합쳐도 한국 단일시장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5일 파이낸셜타임즈(FT), 니혼게이자이 등 주요 외신은 EU의 지나친 규제가 통신사간 자유로운 경쟁을 저해해 발목을 붙잡은 것이 시장변화에 부응하지 못한 핵심적 패인(敗因)이 됐다고 분석했다.
EU 내에는 군소 이통사가 난립하고 있지만 엄격한 규제로 인해 인수합병(M&A)은 줄줄이 무산되고 요금인하 압박도 거세다. 이는 통신사의 수익성 하락으로 연결돼 결국 설비 확충 등 투자를 보수적으로 하게 된 주된 원인이라는 주장이다.
현재 유럽은 미국과 비교해 시장 규모는 비슷하지만 이통사 수는 35배나 된다. 미국 최대 이통사인 버라이즌은 현지 시장의 30~40%를 점유한다. 반면에 유럽은 국가별로 3~4개 이상 군소 이통사가 경쟁한다. EU 전체로는 사업자수가 170개가 넘는다.
수익률은 당연히 떨어진다. 시장조사업체 샌포드번스타인에 따르면 미국은 이동전화 가입자 1인당 매출이 49달러로 5년 전에 비해 25% 증가했다. 유럽은 24유로로 같은 기간 15%나 떨어졌다. 당장은 이용자에게 혜택으로 보일 지 모르지만 새로운 서비스를 도입해도 큰 이익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이통사들의 투자가 소극적일 수 밖에 없다.
지난해 스페인 최대 통신사인 텔레포니카의 4분기 순이익은 39억유로였다. 설비 투자액은 35억유로 가량. 같은 기간 미국 최대 통신사인 버라이즌은 105억달러의 순이익을 벌어들여 설비 투자에만 161억달러를 썼다. 이런 과감한 투자가 가능한 것은 `다시 돈을 벌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EU와 각 국 규제 당국은 독점 기업보다는 군소 기업 간 경쟁을 독려해왔다. 호아킨 알무니아 EU집행위 경쟁 정책 담당 위원은 “요금 측면에서 거대 기업이 탄생하게 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그리스 2위 이통사인 보다폰그리스는 3위 업체인 윈드헬라와 인수합병(M&A)을 추진했지만 당국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처럼 이통사의 투자가 지연되고 LTE 등 신규 서비스 주도권을 잃자 EU도 속속 묘안을 내놓고 있다. 우선 27개국 EU 회원국 단일 통신시장을 만들기 위한 행보가 빨라졌다. 넬리 크로스 부위원장은 3일 “통신 사업자에 기지국 및 주파수 등의 공유를 촉진하고 경쟁력을 높일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270억유로(약 40조원)를 조성해 투자할 계획이다. 영국에서는 지난해 보다폰과 스페인 텔레포니카 산하 O2가 기지국의 상호 이용으로 제휴하여 각각의 통신망을 40% 확대했다.
[표] 유럽지역 통신서비스 매출 추이 (단위 유로, 자료 유럽이동통신사업자연합(ETNO))
※EU 27개 회원국 매출 포함. 음성·문자·모바일 데이터&인터넷 수익 모두 합친 것.
허정윤기자 jyhu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