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한약 처방은 대부분 증상에 따른 처방 위주다. 한약제조법이 중의학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약재 배합과 치료법을 기술한 기존 서적에는 병과 처방이 공식처럼 되어 있어 한약 문외한도 돌팔이 흉내쯤은 낸다. 십전대보탕, 경옥고, 사물탕, 녹용대보탕 등을 아무나 만들어 팔고 지어먹는다.
하지만 이렇게 지어먹는 한약이 항상 효과가 있을 수 없다. 설사가 나고 열이 나거나 다른 부작용으로 고생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아니면 증상별 처방으로 병이 회복되다가 다시 정체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한의원에서 약을 지어 먹고 가슴이 두근거려 다시 문의했더니 우황청심환을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가 증상이 더 심해졌다고 한다.
한의학이 중의학과 결정적으로 다른 길을 걷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동무 이제마 선생 역시 동의보감을 깊게 공부했지만, 자신의 병 증상만을 두고 처방했기 때문에 효과를 볼 수 없었다.
그는 고민을 시작한다. `체질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체질에 맞는 처방을 한다면….` 조선후기 의학자인 이제마 선생이 창안한 우리 민족 고유의 의학인 사상의학은 이렇게 출발했다. 사상의학은 태양인과 태음인, 소양인과 소음인 등 사람의 체질을 4가지로 구분하고 병을 진단하고 치료한다.
1894년 편찬된 `동의수세보원`에서 처음 소개됐다. 사상이란 본래 주역에 나오는 말로 `태극은 음양을 낳고 음양은 사상을 낳는다` 에서 유래했다. 태양·태음·소양·소음 등 사상을 체질에 연결시켜 사람 체질을 구분했다. 각기 체질에 따라 성격·심리상태·내장기 기능이 다르며 이에 따라 병리·생리·약리 등의 방법과 음식도 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상의학은 한의학계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10여 년 전부터 사상 처방을 쓰는 비율이 급격히 늘어났다. 전체 한의사 처방 중 25% 정도에 달한다. 특히 질병 분야는 압도적이다. 이런 사상의학에 최근 첨단 기술을 접목한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사상의학을 기반으로 사상체질 진단기기와 사상체질의 생물학적 특성연구, 사상체질 정보은행 구축사업 등이 이뤄진다. 사상체질의 진단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정확한 진단에서 정확한 처방이 나오기 때문이다. 정부 출연연구기관인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는 2010년 개발한 체질진단 툴의 정확도 향상과 편리성 개선을 위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체질 임상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며 체질의 유전 연구를 벌이고 있다. 체질정보를 통합 분석하고 체질 질병의 유전성 연구를 통해 진단 모델 등의 성능 개선이 기대된다. 진단 툴과 체질 진단 모델 등을 통해 심혈관 대사질환 연관 연령 의존적 유전인자를 대상으로 체질별 유전적 위험도와 관련 기능을 규명할 수 있을 전망이다. 다기관 임상연구 협력네트워크를 통한 체질정보은행의 체질임상정보와 생물학적 정보를 확충해 이를 바탕으로 체질전문가의 처방 로직을 객관화한 알고리즘도 개발하고 있다.
객관적 진단 툴을 이용해 자신의 체질을 진단하고 체질에 맞는 치료를 할 수 있는 맞춤의학을 구현 한다는 계획이다. 간단한 체질 진단 칩으로 자신의 체질을 판단하고 이에 따라 체질 처방을 받을 수 있는 맞춤의학 시대의 도래를 점쳐볼 수 있다. 연구팀은 앞으로 환자의 체질적인 약점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예방→경고→치료`라는 3단계의 전주기적 건강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고 체질 진단 툴, 체질 진단 수준 모니터링 시스템, 체질진단 맞춤신약 등 세계 시장을 혁신할 기술을 개발할 예정이다.
그동안 한의사 주관적 판단에 의존했던 태양인과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 등 4가지 사상체질 진단을 안면사진과 체형측정자료, 혈액정보, 설문 등의 4가지 방법을 통해 진단할 수 있는 체질 진단 툴을 개발했다. 정확도 80% 이상이다. 우리나라 사상체질 연구에서 객관적인 기법을 통해 정확도 80% 이상을 구현한 것은 처음이다.
체질 진단 툴 개발에는 전국한의과대학과 협력해 구축한 체질정보은행에 축적된 임상 체질 정보 2600증례가 활용됐다. 체질정보은행은 안면·체형·음성 등 계측자료, 생리특성·성격특성 등 설문자료, 한의사 진단 및 약물반응 등 임상자료, 32종 혈액분석정보 및 유전자정보 등 생물학적 자료 등을 통합한 DB를 갖추고 있다.
시스템은 국내 최대 한방병원인 경희의료원 등 국내 3개 대학병원에서 환자들을 대상으로 활용중이다. 각 병원에 내원한 환자가 진단 받은 뒤 각각의 데이터 값을 입력하면 온라인으로 연결된 한국한의학연구원 서버에서 분석되어 1분 후 결과를 PC 모니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한의학연은 1명 진단에 15분 정도 소요된다.
최근 가정에서 체질 및 건강 수준을 진단하고, 침이나 뜸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자극을 활용해 자신의 건강을 관리할 수 있는 `통합 체질 건강 진단·자극 시스템` 알고리즘도 개발했다. 오감 진단기기를 이용해 체질 및 건강을 진단하고, 진단결과를 바탕으로 레이저와 자기장을 이용한 전기적 침이나 고주파 뜸 자극을 통해 건강 관리할 수 있는 통합 시스템이다. 오는 10월에는 `통합 체질 건강 진단·자극 시스템` 개발을 완료해 실버타운, 건강검진센터 등에 우선 보급할 예정이다.
건축과 토목공학을 전공한 공학자의 길을 걷다가 한의학을 전공한 한국한의학연구원 김종열 박사는 “음인에게 효과적인 인삼과 녹용을 양인에게 쓰면 효과보다 부작용을 입기 쉽다”며 “기술 개발로 객관적인 체질 진단이 확립된다면 한의사가 보다 객관적이고 정확한 체질 진단을 통해 적절한 처방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도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서 일하던 중 축구를 하다 발목을 다쳐 찾아간 한의원에서 20년 이상 계속된 설사병을 고친 뒤 삶의 진로를 바꿔 한의학, 특히 사상의학에 빠져 들었다.
홍기범기자 kbho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