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122> 배순훈 정통부 장관

1998년 3월 4일 오전.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한 배순훈 정보통신부 장관은 마중 나온 이성해 기획관리실장(현 KT 경영고문)과 신영수 정통부 공보관(한국무선국관리사업단 이사장 역임)의 안내를 받아 곧장 청와대로 직행했다.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지각 장관 임명장을 받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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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통령은 이날 본관 2층 백합실에서 김종필 국무총리서리가 배석한 가운데 배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김 대통령은 배 장관에게 임명장을 준 뒤 “프랑스에서 열심히 일하는데 불러서 미안하다. 앞으로 우리가 지식정보사회로 가야하는데 정통부가 큰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이제 전문가를 불러왔으니 열심히 정보강국을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김 대통령은 이어 자리를 옮겨 배 장관과 30여분 간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배 장관의 회고.

“김 대통령과는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습니다. 언론을 통해 김 대통령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전부였어요. 처음 만남인데 김 대통령의 유머감각은 대단했고 마치 이웃집 아저씨를 만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김 대통령은 앨빈 토플러가 쓴 `제3의 물결`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김 대통령은 배 장관이 대우전자 사장시절 “기본에 충실하자”는 모토를 내세워 탱크주의 열풍을 몰고 왔던 TV광고를 예로 들며 “그 광고 정말 좋았다. 사람들이 그 광고를 많이 좋아하더라”며 대화를 이끌었다.

청와대 일정을 마친 배 장관은 곧장 정보통신부 청사로 돌아왔다.

이계순 당시 장관 비서관(현 우체국금융개발원장)의 기억.

“그날 저는 공항에 나가지 않고 집무실에서 대기했습니다. 강봉균 장관에 이어 배 장관을 퇴임 시까지 모셨는데 배 장관은 전문경영인 출신답게 가부(可否)가 분명하고 간부들과 토론을 많이 하셨습니다.”

배 장관은 청사 입구에서 박성득 차관(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 KMI 이사회 의장)을 비롯한 간부들의 영접을 받았다.

배 장관은 오후 2시 정통부 대회의실에서 취임식을 갖고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배 장관은 취임사에서 “IMF 체제라는 시대적 도전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지름길은 정보화에 있다”며 “민간 창의력을 가로막는 각종 규제는 과감히 완화하거나 철폐하고 공정한 경쟁이 이뤄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배 장관은 역점사업으로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과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국가사회 정보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소프트웨어산업과 벤처기업 등 미래 국가경쟁력의 핵심인 정보통신사업을 적극 육성 발전시키며 △통신과 방송업무의 융합 추세에 적극 대응하고 △우정사업 경영합리화를 촉진해 자립경영의 기반을 정착시키고 △정보통신정책은 투명하게 시장경제질서에 따라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배 장관은 새 정부 각료 가운데 유일한 민간기업 첫 전문경영인의 입각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야당인 한나라당도 배 장관의 발탁을 높이 평가했다.

맹형규 한나라당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17명의 각료 중 배순훈 정통부 장관을 제외하고는 참신한 인사가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배 장관은 1943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서울대 공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MIT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세계에서 난다 긴다 하는 수재들이 모인 MIT에서 장학금을 받아 석사과정을 끝낸 뒤 6개월 만에 박사과정을 마쳤다. 그의 학위 논문은 그 분야의 핸드북에 실렸다. 배 박사가 MIT 박사학위를 받자 미국 이민국에서 곧바로 영주권을 내주었다. 미국 보그워너사 주임기사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은 배 박사는 1972년 완공한 미국 무역센터의 에어컨시스템을 설계했다. 무역센터는 높이가 416m로 당시 세계 최고층 건물이었다. 그 여세를 몰아 미국 TMI 원자력발전소 저온 냉동기도 설치했다. 이어 당시 극비에 속했던 원자력잠수함 냉동기도 설계했다. 이 작업을 위해 미국 국방성은 배 박사에게 비밀취급인가를 내주었다.

미국에서 잘나가던 그는 1972년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정근모 박사(과학기술처 장관, 명지대 총장 역임. 현 한국전력 고문)가 KAIST 부원장으로 부임하면서 기계과 조교수로 일하자고 설득했던 것이다.

배 장관의 증언.

“그 과정을 이야기하자면 사연이 길어요. 처음엔 미국 국제개발처(AID)에서 연구비를 받아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자동차 엔진을 만들어보자며 정근모 박사와 이경서 박사(단암전자통신 회장 역임), 제가 의기투합했어요. 정 박사는 AID 책임자인 존 한나 박사와 친했어요. 그런데 AID에서 무상원조를 지양하고 한국에 MIT같은 교육기관을 설립키로 방침을 변경했어요. 박정희 대통령도 이를 적극 지원키로 해 정 박사가 KAIST 설립을 주도했고 나중에 부원장으로 부임했어요.”

그해 말. 박정희 대통령이 KAIST를 초도순시했다. 박 대통령을 안내하던 과학기술처 국장이 배 박사를 대통령에게 “MIT 박사입니다”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이 갑자기 물었다.

“연탄 온돌방에서 자다가 가스중독으로 사망하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데 해결방법이 없습니까.”

느닷없는 물음에 배 박사가 머뭇거리자 박 대통령이 다시 말했다.

“좋은 대학 나왔으면 그런 연구를 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 놓고 잘 수 있게 해야지.”

그 후 배 박사는 거액의 연구비를 받아 서울 홍릉과학원 안에 집을 한 채 지어 놓고 온돌연구에 착수했다. 1973년 배 박사는 연구보고서를 제출했다. 무색무취의 치명적인 가스가 방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한바탕 난리가 났다.

박 대통령은 “박사가 왜 안 된다고 하느냐.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지 말고 되는 해결방안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배 박사는 대안으로 온수 온돌을 제안했다. 아궁이를 밖에 설치하면 연탄가스는 해결하는데 문제는 돈이 더 든다는 점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경기도 용인에 온수 온돌단지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이게 오늘날 온수 온돌의 시작이었다.

그는 1976년 한국기계 부곡철도차량 공장에서 김우중 대우 회장을 처음 만났다. 김 회장은 완벽주의자인 동시에 모험가였다. 그는 기존관행에 얽매이지 않는 창의적 기업인이었다.

그는 1976년 대우중공업 기술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회고.

“당시 선배인 조순탁 박사(작고. 서울대 교수, KAIST 원장 역임)에게 상의를 했더니 `현장에서 뛰는 것도 좋다. 가서 마음에 안 들면 다시 KAIST로 돌아와라. 받아 주겠다`고 해서 이직을 했어요.”

그는 대우로 가자 울산발전소를 턴키방식으로 수주해 1978년 완공했다. 국내 발전소 사상 초단기 완공 기록을 세웠다. 이후 그는 대우엔지니어링 부사장, 대우 기조실 전무, 대우자동차부품 사장, 대우국민차 사장으로 일했다. 대우 재직 중 1982년부터 2년간 미국 스탠포드대학과 MIT에서 각 1년씩 공학설계와 시스템설계를 강의했다.

그는 대우자동차부품 사장시절 수입하던 티코 브레이크를 자체 개발했고, 1988년 자동차용 발전기를 개발, 1989년 대한민국 과학기술상을 받았다.

1991년부터 1997년까지 대우전자 사장과 회장을 역임하면서 1993년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탱크주의`를 주창(主唱)했다. 그는 현장 사원들에게 “우리가 만든 제품을 미국과 독일, 프랑스 사람들이 사게 하려면 품질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배 사장은 매일 아침 작업을 하기 전 시(詩)를 낭송하며 15분씩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현장개혁을 추진한지 3개월이 지나자 대우 제품은 소니보다 생산성이 높았고 품질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향상됐다. 이런 노력으로 대우전자는 1000만대의 포터블 라디오를 수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세계 시장 점유율 10%에 해당하는 물량이었다.

배 사장은 탱크주의 TV광고에 인기 탤런트 유인촌(문화관광부 장관 역임. 현 대통령실 문화특별보좌관)과 같이 출연했다.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이 광고로 배 사장은 `탱크박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광고에서 배 사장은 공장을 방문한 유인촌에게 “여기가 바로 탱크주의 심장부”라고 소개한다. 이어 둥근 쇠망치로 브라운관을 치는 실험을 본 유인촌이 “어, 안 깨지나요”라고 놀라자 옆에 있던 직원이 “탱크주의 제품이거든요”라고 대답한다.

또 다른 광고에서는 유인촌이 “올해 탱크주의를 발표하셨는데 아주 강한 느낌이 들던데요”라고 하자 배 사장이 “네, 탱크주의는 2000년까지 쓸 수 있는 튼튼하고 편리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죠”라고 말한다.

이 광고는 대우전자 구미공장에서 촬영했다. TV 200여대와 임직원 100여명이 엑스트라로 동원됐다고 한다. 배 사장의 출연료는 없었다.

배 장관의 말.

“내가 회사 CEO인데 무슨 광고료를 받아요. 무료로 출연했어요.”

탤런트로 승승장구하던 유인촌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2009년 2월 배 전 장관은 문화부 산하기관인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임명됐다. 그에게 임명장을 준 사람이 유인촌 장관이었다. 세월이 흘러 대기업 CEO와 전속 광고모델 관계가 장관과 산하기관장으로 만난 것이다. 사람의 인연이란 알 수 없었다.

대우전자 회장시절인 1996년 배 회장은 프랑스 국영기업으로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톰슨멀티미디어 인수전에 나섰다. 그해 10월 17일 프랑스는 톰슨멀티미디어를 대우전자에 넘기기로 했다고 공식 발표했으나 국가최고위원회가 부결시켜 성사 직전 무산됐다.

배 회장은 1998년 1월 프랑스 대우전자 사장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업무 시작 2개월여 만에 김대중 정부 각료로 입각(入閣)해 다시 귀국길에 올랐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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