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민우 벤처기업협회 회장· 다산네트웍스 대표 (kimjh@dasannetworks.com)
국내 시장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공정한 거래 관행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납품단가 후려치기, 기술 탈취, 불합리한 거래 조건의 일방적인 강요 등 `갑을 문화` 왜곡이 가져온 폐단이다. 장비업계의 현안인 유지관리 요율의 현실화 문제도 같은 맥락이다.
요율 문제는 소프트웨어 업계에서 일찍부터 제기한 이슈로 문제 본질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납품된 소프트웨어 제품에 대해 공급자는 워런트 기간 동안 무료로 하자 보수 등 유지관리 서비스를 제공해 주다가 워런트 기간이 종료되면 유지관리 계약에 의거해 유료로 서비스를 전환한다. 회사 거래에서는 유지관리 계약은 아주 중요한 사안이다. 고객서비스 중에 발생하는 제품 하자에 대해서 회사가 즉각적으로 대응해주지 않으면 고객 불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무상 워런트 기간이 끝나면 바로 유상 유지관리 계약을 맺는 것은 업계 상식으로 통한다.
소프트웨어 경우에는 정부 관심과 글로벌 대기업의 입김으로 공공기관이나 기업이 글로벌 스탠더드 거래 관행을 받아들였고, 이런 문제가 비교적 일찍 해결되었다. 일년 단위로 제품 가격의 25%를 유지보수비로 꼬박 꼬박 챙겨가는 글로벌 업체 룰이 오히려 공급자 횡포로 느껴진다. 이는 국내 소프트웨어 성장을 등한시한 결과로 부메랑을 수요업체가 맞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대략 10%선인 국산 소프트웨어 유지관리 요율은 장비 업계 입장에서 보면 아주 부러운, 좋은 거래 관행이다.
장비업계의 유지관리 계약에 대한 거래 관행은 훨씬 열악하다. 통신장비 업계만 보더라도 평균적인 유지관리 요율은 장비 가격의 1%선에 머문다. 10%에 이르는 외국산 장비에 비하면 턱없이 낮다. 소프트웨어와 달리 장비 가격 구조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결합된 형식이어서 소프트웨어 절반 정도 수준으로 유지관리 요율이 형성되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현재 1% 선에 머무는 국산 장비의 유지관리 요율은 너무나 불공정하다. 이런 식의 국산 역차별 거래 관행은 결국 현재의 소프트웨어 업계에서 볼 수 있듯이 글로벌 대기업에게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는 장비 업계 미래를 예상하게 한다. 낮은 요율 문제뿐 아니라 갈수록 늘어만 가는 무상기간이 또 다른 문제다.
원래는 관행적으로 장비업계에서는 1년간 워런트 기간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2년, 3년으로 기간이 자꾸만 늘어가고 있다. 혹자는 계약을 거부하면 될 것 아니냐고 주장할 지도 모르나 그것은 시장의 현실을 너무나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국산 장비업체의 선택의 폭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한마디로 울며 겨자 먹기라도 해야만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열악한 시장 환경이다.
필자가 평소에 주장하는 불균등한 시장 상황에서 공정한 심판과 같은 제3자 개입론은 이런 경우에 꼭 필요하다. 경제적 약자가 불균등한 상황에서 밑도 끝도 없이 불리한 조건으로 내몰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무상 기간에 대한 제한 규정, 최소 요율의 룰 등을 정해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행위는 어떻게 보면 과도한 시장 개입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수요자 입장에서는 장비 구매를 안 하거나 유지관리 계약을 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대다수의 통신업체는 단말기 등 수량이 많은 제품에 대해서는 공급자와 계약을 하지 않고 전문 수리업체와 더 낮은 요율로 계약한다.
일전에 방통위에서는 장비업계 현안에 대해 인지하고, 통신장비 유지관리 계약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내용이 너무나 추상적이고 강제력이 없어서 당장은 효력도 없고 유명무실하긴 하나 정부 당국이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서 인지를 한 점은 긍정적인 발전이다. 첫 단추는 그렇게 시작했더라도 앞으로 양 당사자 의견을 충분히 듣고 공급자와 수요자 모두가 합의할 만한 내용을 담은, 구체적으로 실천 가능한 가이드라인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는 동반 성장의 구체적인 모습이 될 수 있다.
동반 성장은 납품업체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요구되는 삼성전자나 현대차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내기업으로부터 소프트웨어와 장비를 구매하는 공공기관과 대기업에게도 똑같이 요구되는 합리적인 덕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