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중소기업이 여유가 있어 재테크로 가입했겠습니까. 대한민국 은행들은 도덕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지난 23일 파생금융상품 키코(KIKO) 소송에서 승소한 심재균 테크윙 대표는 “그간의 억울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다. 금융에 무지한 중소 기업이 환위험을 줄이기 위해, 어떻게든 아껴보려 한 일을 환 테크 목적으로 투기하려다 당했다고 비난할 때 느끼는 소외감은 매우 컸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1부는 테크윙 등 4개 기업이 하나은행 등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피해액의 60~70%를 배상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 그동안 키코 소송과 관련해 10~50% 수준의 배상 판결은 있었지만 은행 책임을 더 물은 것은 처음이다. 재판부는 “원고가 통화옵션거래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피고가 키코 계약의 주요 구조와 위험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히 설명할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시했다.
심 대표는 “우리가 거꾸로 걱정을 했는데도 은행은 계속 (키코에) 들어달라고 찾아왔다. 심지어 본인들의 실적을 올려야 한다고 얘기까지 했다. 그래놓고 일 터지니까 자기들은 모른다는 거였다.”고 항변했다.
이 판결은 키코 피해 기업들이 다소나마 회복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테크윙과 함께 승소한 엠텍비젼측은 “승소로 55억원 정도를 회수할 수 있지만 그간 피해액이 약 700억원에 달한다”며 “이제 시작에 불과하고 철저히 준비해서 가시적인 재무구조 개선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키코 피해 기업 공동대책위에 따르면 200여개 기업이 키코 문제로 은행과 법적 공방에 나섰다. 1심 판결은 대부분 마무리됐다. 135개 기업이 항소심을, 15개사는 대법원 상고를 진행한다.
은행 책임을 더 무겁게 본 이번 판결로 진행 중인 키코 분쟁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지 관심이다. 아울러 그동안 피해에도 소송을 주저했던 기업들이 전면에 나서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김화랑 키코 공대위 사무처장은 “판결 소식이 전해지면서 소송 가능 여부를 묻는 문의가 늘었다”며 “지금까지 항소심도 1심과 마찬가지로 배상 비율이 10~50%를 넘지 않았는데 전향적인 판결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피해 기업만 700여곳에 이르고 금액으로 10조원에 달하는 키코 사태. 수년간 악몽에 시달리며 극단적 상황까지 몰렸던 피해 기업들은 소송 승패 자체보다 사태의 원인과 책임 소재 등 진실 규명을 간절히 바란다.
윤건일기자 benyun@etnews.com, 정미나기자 mina@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