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일본제철이 우리 돈 1조4000억원대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것은 오랜 기간 치밀한 준비 끝에 이뤄진 일로 보인다. 본격적인 출발은 지난 2007년 10월 포스코 기술유출 사건이었다. 당시 대구지검 특수부는 포스코의 핵심 제조 기술 자료를 중국 경쟁사에 넘긴 혐의로 포스코 전직 연구원 두 명을 구속했다. 문제의 자료는 포스코가 지난 10년간 150여명의 연구 인력과 450억원을 투입해 개발한 핵심 기술이었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 전혀 뜻밖의 주장이 나왔다. 해당 자료들이 포스코가 아닌 신일본제철 기술이라는 반박이다. 본지가 당시 사건 판결문을 확인한 결과 `포스코가 신일본제철의 전임 기술자로부터 관련 자료를 불법적으로 취득한 것이기 때문에 포스코의 영업비밀이 아니다`는 피고 주장이 담겨 있었다.
신일본제철은 경쟁사인 포스코의 기술유출 사건을 관심 있게 지켜보던 차에 판결문을 구한 것으로 보인다. 자사 핵심 기술인 전기강판 제조 기술이 경쟁사인 포스코로 몰래 넘어갔다는 주장을 접하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정보 수집에 나섰다.
전기강판은 모터 철심 등에 쓰이는 소재다. 전기차·하이브리드카 등에 널리 활용돼 수요가 급증하는 고부가가치 소재다.
포스코 기술유출 사건의 형사기록에 어떤 내용들이 담겨 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내용에 따라 상당한 파장을 몰고 올 뇌관이 될 수 있다. 본지 확인 결과 포스코 기술유출 사건 항소심 재판부는 포스코가 저온가열 방향성 전기강판 제조기술을 개발할 당시 신일본제철 퇴역 기술자들 또는 일본의 기술 자문회사들과 용역계약을 체결한 뒤 신일본제철의 각종 자료와 정보를 제공받은 점이 사실로 인정됐다. 또 재판부는 당시 포스코 사건의 영업비밀이 `신일본제철 기술과 유사한 점이 적지 않다`는 취지의 판단도 내렸다. 포스코의 부정 기술 취득을 주장하는 신일본제철에는 결정적 근거가, 반면에 포스코에는 큰 부담이 될 내용들이 형사 기록에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일본 현지 언론에 따르면 신일본제철은 재판 기록 분석 과정에서 포스코에 기술을 넘긴 자사 전직 간부의 이름을 파악했다. 자택 압수 수색 과정에서 이들과 포스코의 관계를 드러낸 문건 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일본제철이 한국 법원에서 준항고를 통해 새 내용이나 추가적인 자료를 확보하면 포스코를 상대로 한 공세 수위를 높일 것으로 보인다. 추가적인 민사소송 제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포스코 측은 이에 대해 `문제 될 것 없다`는 견해다. 이 회사 관계자는 “당시 재판에서 전직 연구원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이는 곧 그들이 유출하려 했던 기술이 포스코 독자 기술임을 재판부가 인정했다는 뜻”이라며 “준항고 사건에서 기록 공개가 결정돼도 포스코의 기술임은 변함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정정당당하게 대응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윤건일기자 beny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