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플레이, 제 3의 물결이 온다.`
우리나라 디스플레이 산업이 또 한번 격동기를 맞고 있다. 그동안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은 몇 번의 큰 변혁을 겪었다. 평판디스플레이(FPD) 기술 종주국 일본을 추월한 저력이 제 1의 물결이었다면, 시장을 꿰뚫어 본 과감한 투자는 세계 시장을 석권한 제 2의 물결이었다. 이제는 LCD를 넘어 새로운 디스플레이, TV 시장을 넘어 새로운 분야에서 해외 기업들과 초격차를 벌여 선두 지위를 확고히 해야 하는 변화의 시점이다. 바로 제3의 물결을 선도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녹록치만은 않다.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의 지위는 분명 최고이지만, 앞을 내다보기 힘들다. 시장은 성장 모멘텀을 잃었으며 결코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중국 등 후발 주자들의 공격이 만만치 않다. 새로운 기술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 최강에 군림해온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이 다른 나라와 초격차를 벌일 수 있을지, 아니면 추격을 따돌리지 못해 혼돈의 시대에 접어들지 확신할 수 없다. 또 한번 갈림길에 선 것이다.
전자신문은 소재부품초일류 연중기획을 통해 전 세계 디스플레이 산업에 몰아칠 제 3의 물결이 무엇인지, 국내 기업들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지를 심도 깊게 진단해 본다.
◇대형 LCD 중심 디스플레이 시장 포화 = 지난 1970년대부터 LCD를 개발한 일본을 한국이 뛰어넘은 것은 지난 2001년부터다. 지난 1995년에야 소형 LCD를 양산한 우리나라가 일본을 따라잡은 데 불과 6년이 걸렸다. 이후 국내 디스플레이 산업은 말 그대로 `초고속` 성장세를 탔다. 한국이 세계 1위 디스플레이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LCD의 대형화 추세를 먼저 읽고 시장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중소형 제품 위주였던 LCD는 지난 2006년부터 상황이 바뀐다. TV에 본격 채택되기 시작한 것이다. LCD TV를 처음 선보인 곳은 역시 일본(세이코 엡손)이었으나, 실제 시장에서는 한국이 기선을 잡았다. 불황 속에서도 대형화와 원가 절감을 위한 설비 투자를 앞서 단행한 덕분이다.
하지만 근래 대형 LCD 시장은 서서히 포화된 양상을 띠고 있다. 전체 디스플레이 시장의 침체도 함께 나타났다. 시장 조사업체 디스플레이뱅크에 따르면, LCD 패널시장은 지난 2006년 679억 달러에서 2011년 947억 달러로 성장했다. 올해 1000억 달러 대의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전망되지만, 성장률은 과거에 미치지 못한다. 내년에는 7% 성장률에 그친뒤 매년 줄어들어 오는 2016년에는 1% 수준에 머물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들어 LCD 패널 가격이 상승하고 있지만 이는 지난 해 최악의 불황을 벗어난 정도의 수준이다. 쌓여있던 재고를 털어낸 현상으로, 지금은 매달 가격이 1~2달러 가량 상승 중이다. 그나마 스마트패드(태블릿PC)와 모바일 시장이 성장을 이끌고 있다. 아무리 성장률이 좋다고 해도 절대 시장 규모가 작은 편이어서 LCD 시장 전체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브라운관(CRT)에서 LCD TV로 넘어가면서 디스플레이 시장이 성장의 모멘텀을 찾은 것처럼, TV 시장에서 새로운 디스플레이가 나타나야 디스플레이 시장이 다시 한 번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LCD TV 시장의 침체가 디스플레이 산업 전반에 악재인 동시에 새로운 변화를 모색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드는 기회인 셈이다. 대형 LCD 위주 시장은 포화상태에 접어들었지만, 기술 혁신의 틀은 전혀 새로운 장으로 접어들고 있다.
◇글로벌 시장의 재편 = 대형 LCD 패널 시장의 침체에 더해, 한국 디스플레이 시장을 겨냥한 중국·대만의 맹공격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패널 회사들은 이익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과감한 투자를 진행 중이다. 중국 BOE와 CSOT는 지난해부터 8세대(2200×2500㎜) LCD 라인을 가동하기 시작했으며 추가 라인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더욱이 중국 TV 제조사들은 자국 내 패널 비중을 급격히 늘리고 있다. 중국 LCD 산업 보호를 위해 수입 관세도 올렸다. 첨단 디스플레이 시장에도 진출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한국과 더불어 LCD 시장의 빅2인 대만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정부 주도의 M&A를 통해 규모의 경제를 갖춘 대만 LCD 패널 업체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특히 최근에는 일본과의 연합군을 통해 기술 취약점도 보완하려고 하고 있다. 심지어 대만 혼하이 그룹이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 샤프의 LCD 사업을 인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대만은 능동형 유기발광다이오드(AM OLED) 분야에서도 일본과의 연합을 통해 시장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일본도 과거의 명성을 접고, 중소형 패널을 중심으로 살 길을 찾고 있다. 도시바·소니·히타치는 중소형 패널만을 떼어 내 저팬디스플레이를 만들었다. 지난 4월 1일 출범한 이 회사는 `타도 삼성`을 외치며 중소형 패널 넘버원을 위해 돌진하고 있다.
안현승 더엔피디그룹코리아 사장은 “혼하이에 샤프를 넘긴 것은 일본 자존심에 큰 상처가 됐을 것”이라며 “그만큼 큰 변화가 글로벌 시장에서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새 디스플레이에서 기회 찾는다 = 디스플레이 시장을 다시 한 번 창조할 산업으로 주목받는 것은 AM OLED TV와 플렉시블 디스플레이가 대표적이다.
이미 올 초 CES에서부터 AM OLED TV 시장 선점 경쟁은 시작됐다. AM OLED는 천연색에 가까운 색을 구현할 뿐 아니라 친환경적이어서 침체된 LCD TV 시장을 대체할 새로운 디스플레이로 각광받고 있다. 아직은 경제성을 갖춰 대형 패널을 양산할 정도는 아니지만 55인치 패널을 개발한 기술력을 가진 곳은 현재 한국뿐이다.
이보다 더 큰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AM OLED 플렉시블 디스플레이다. 잘 깨지지 않은 디스플레이, 휘어지는 디자인 등의 특성을 활용하면 적용 범위는 무궁무진하다. 두루마리처럼 말 수 있는 전자종이나 둥근 테이블을 따라 곡면으로 휘어진 모니터 등등. 플렉시블 디스플레이는 올 해부터 시장에 양산품으로 나올 전망이다.
이 같은 디스플레이 신시장을 선점해 한국 디스플레이는 LCD를 넘어 영원한 맹주의 자리를 굳힐 수 있다는 기대다. 특히 새로운 디스플레이에서 기회를 찾는 제 3의 물결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국내 전후방 연관 산업의 성장도 모색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디스플레이 시장을 개척한 기술력과 노하우는 전후방 산업에도 그대로 녹아든다. 소재·부품·장비 등 후방 산업군에서는 먼저 시장에 내놓은 제품이 세계 시장의 표준이 될 수 있다. 일본 LCD 산업이 자국내 소재 기업과 장비 기업을 키운 것처럼 한국의 전후방 산업 또한 차세대 디스플레이 시장에서는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문대규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 디스플레이PD는 “디스플레이 패널의 경쟁력을 위해서는 소재나 장비의 경쟁력도 확보되어야 한다”며 “차세대 디스플레이 산업의 기초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후방 산업의 기술 경쟁력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문보경기자 okm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