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전자제품에서 자동차, 슈퍼컴퓨터, 항공기에 이르기까지 각종 부품들 사이에서 전기적 신호를 연결해 주는 다리. 흔히 전자 제품의 `혈관` `신경망`으로 비유되는 인쇄회로기판(PCB)이다.
지난해 세계 PCB 시장은 글로벌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전년 대비 4% 성장한 588억달러에 이른 것으로 추산된다. 우리나라 PCB 시장 규모도 결코 작지 않다. 74억81000만달러로 세계 시장의 13%를 차지한다. 각종 원부자재에서 설비·임가공 등 후방 산업을 합친 산업 규모는 15조원을 넘어섰다. 산업 규모만 놓고 보면 PCB가 반도체·디스플레이에 이어 여전히 주력 부품 산업일 수밖에 없는 위상이다. 최근 IT 고도화로 제품의 경박단소화와 더불어 고집적·저전력 반도체 기술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PCB 기술의 중요성도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본지는 앞으로 5회에 걸쳐 PCB 산업을 집중 조명한다. 세계 시장 변화 속에서 한국 PCB 산업 현주소와 발전 방향을 모색해본다.
최근 세계 PCB 시장에서도 스마트 열풍이 한창이다. 스마트폰과 스마트패드용 고성능 대용량 기판을 필두로, 컴퓨터·반도체 시장에서도 PCB 산업은 뚜렷한 성장세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4%의 신장률을 달성하며 세계 PCB 시장이 600억달러 고지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는 것도 스마트 기기가 견인차다. 특히 스마트폰 시장 수요에 힘입어 빌드업(적층:여러 개의 기판을 쌓아 만든 제품) 기판 시장과 연성인쇄회로기판(FPCB) 시장은 지난 2010년부터 올해까지 연평균 각각 9%와 8%의 고속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IT 시장에서 스마트 대전이 펼쳐지면서 PCB 기술도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전자 기기의 고기능화·고집적화 추세로 경성 PCB 기판 시장에서는 빌드업 기판이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양상이다. 회로폭 40㎛ 이하, 홀직경 120㎛ 이하 제품도 양산을 앞두고 있다. FPCB 분야에서도 빌드업 기술이 확산되는 가운데 올해는 회로폭 35㎛ 수준의 제품까지 등장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 밖에 반도체용 기판 시장에서는 최첨단 적층 기술과 초미세회로화가 더욱 진전되는 추세다. 또 세계 각국의 환경 규제가 한층 강화되면서 납이나 할로겐을 쓰지 않는 친환경 자재들은 이미 대세로 굳어졌다.
우리나라 PCB 시장도 세계적인 추세에 뒤처지지 않고 안정적인 성장을 일구고 있다. 지난해 국내에서 매출액 1억달러 이상을 기록한 중견 PCB 기업 수는 16개. 일본의 30개사, 대만의 27개사와 비교하면 적지만 짧은 업력을 감안하면 허리가 강해졌다. 10억달러를 넘어선 삼성전기를 비롯해 상위 5대 기업들은 매출액 5000억원 이상 규모로 올라섰다. PCB 후방 산업군을 포함하면 전체 외형은 이미 주력 소자 산업의 위상으로 올라섰다.
한국전자회로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원부자재·설비·약품·가공 등 후방 산업군을 합쳐 우리나라 PCB 산업 규모는 무려 15조7100억원에 육박했다. 기판 생산액 8조1000억원, 원자재 1조6300억원, 설비 6200억원 등 굵직굵직한 규모로 성장했다. 기판에서 각종 원부자재, 설비에 이르기까지 PCB 기술 선진국인 일본에 의존했던 고부가 제품을 그동안 상당 부분 국산화하며 이룩한 결실이다.
다만 전체적인 외형 성장에도 불구하고 PCB 업계가 국내 주력 산업을 넘어 세계 일류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분야별로 체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조진기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선도 업체들 간 출혈 경쟁을 지양하고 차별화된 글로벌 마케팅 역량을 끌어올려야 한다”면서 “스마트로 새로운 성장 기회를 마련한 세계 PCB 시장에서 한국의 위상을 강화하려면 산학연의 힘을 결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전자회로산업협회가 일본·대만·미국 등 주요 경쟁국과 PCB 산업 경쟁력을 분석한 결과, 우선 기판 시장에서 한국은 제조 설비와 자재 조달 역량이 취약한 편이다. 반면에 우리 경쟁국인 일본은 자재 조달, 제조설비·생산기술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고, 대만은 시스템 설계 경쟁력이 압도적인 우위다. 고부가 시장인 반도체용 기판 산업도 사정은 비슷하다. 우리나라는 설계·제조설비 기술 경쟁력이 여전히 뒤처져 있지만 일본은 제조 설비와 생산 기술에서 한참 앞서 있다. 국내 반도체 업계가 고부가 기판을 아직도 상당량 일본에서의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차세대 기판으로 꼽히는 임베디드 PCB 시장 역시 기술 선진국인 일본·유럽이 선점한 분야다. 국내 전자 업계의 완제품 경쟁력에 힘입어 시스템 설계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이 또한 제조설비와 자재 조달 등 제반 측면에서는 일본과 유럽에 뒤지는 실정이다.
PCB 후방 산업군인 원자재 분야에서도 가격과 품질, 신뢰성을 맞출 수 있는 소재 개발에 주력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시장 흐름에 맞춰 초박형 동박적층판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고, 레진 등 기초 소재 개발이 시급하다. 설비 분야도 국내 PCB 산업의 경쟁력을 가로막고 있는 대표적인 후방 산업이다.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여타 주력 산업에 비해 PCB 장비 업계가 비교적 영세한 규모인 탓에 전문 인력이나 시장 대응력 확보에서 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자부품연구원 임영민 박사는 “한국이 세계 전자 시장을 석권한 지위를 차세대 PCB 시장을 주도할 수 있는 호기로 만들어야 한다”면서 “기판에서 원자재, 설비 산업 전반에 걸쳐 신제품 개발부터 양산에 이르는 일괄 협력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서한기자 hse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