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식민지 IT생태계] <중> 덫 걸린 기업… 팔짱 낀 정부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는 요즘 `애플TV 대항마`를 연구한다. 몇몇 개발자에게는 애플TV가 나온다면 어떤 모습일지 기획하는 업무만 부여했다. 애플TV가 출시되면 이에 맞불을 놓을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도 예상된다.
LG전자는 지난달 미국가전전시회(CES)에서 `구글 TV`를 공개했다. 그동안 자체 운용체계(OS)를 탑재한 스마트TV만 고집하다 한 발 물러섰다. 스마트폰 OS를 빌려 쓰는 구글과의 관계가 고려됐다. LG전자는 스마트TV까지 `안드로이드`에 종속될 수 있다는 우려에 `구글 TV`는 일단 미국에서만 출시하기로 했다. 하지만 애플TV가 아이폰처럼 앱스토어라는 강력한 생태계로 반향을 일으키면 대안은 `안드로이드 마켓`이 될 공산이 크다.
세계 TV시장 1위와 2위인 우리 기업의 불안한 자화상이다. 2년 전 휴대폰 시장에 불어닥친 `아이폰 쇼크`가 TV시장에서 재현될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TV에 이어 냉장고와 같은 가전제품에도 `안드로이드` OS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세계 1위 TV와 가전 산업의 운명이 `안드로이드`라는 외산 생태계에 좌지우지될 위기다.
우리나라 산업이 구글과 애플 리스크에 취약해진 근본 원인은 소프트웨어(SW) 경쟁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하드웨어(HW) 우위 전략만 고집하다 외산 SW와 이를 기반으로 한 생태계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빠졌다.
문제는 `아이폰 쇼크` 이후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고 다람쥐 쳇바퀴 도는 모양새라는 것이다. 중소 가전업체 한 사장은 “우리나라가 안드로이드에 유독 종속이 심한 것은 대기업이 단기성과에 급급해 일단 쉽게 빌려 쓰기 쉬운 구글 OS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라며 “막대한 마케팅비를 쏟아가면서 구글 생태계를 앞장서 키운 것이 TV와 가전 분야에서도 종속을 자초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삼성전자 내부에선 한동안 주목받은 자체 OS `바다`와 `삼성 앱스`에 대한 관심이 식어가고 있다. 안드로이드 독주를 견제할 윈도폰과 같은 경쟁사 OS 탑재 스마트폰 개발진도 당장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크게 줄어든 상태다. LG전자는 스마트폰에서 아예 SW보다 HW 경쟁력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고중걸 로아그룹 연구원은 “지난해 아마존이 후발주자임에도 `킨들파이어`로 스마트패드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킨 것은 전자책을 중심으로 한 콘텐츠 생태계를 갖췄기 때문”이라며 “구글과 애플 독주를 막을 수 있는 것도 결국 이런 SW와 서비스 파워라는 게 입증됐는데, 국내 기업은 여전히 이를 등한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미온적인 감시와 대응도 글로벌 기업 독주와 횡포를 키우고 있다. 모바일 메신저 업체 한 임원은 “국내 대기업이 두 달간 중소기업 앱 업데이트를 거부했다면 당장 공정거래 위반 등의 조사가 들어갔을 것”이라며 “방송통신위원회나 공정거래위원회는 아직 이의 구체적인 실태 파악조차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방통위는 지난해 스마트폰 사용자 위치 수집과 관련해 애플에 과태료 300만원을 부과하고, 애플과 구글에 시정조치를 내렸지만,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애플과 구글은 시정조치를 받은 이후에도 위치정보를 암호화하지 않은 채 휴대폰에 저장해 정부 조치를 비웃는 모습까지 보였다.
방통위나 공정위 업무가 주로 국내 기업을 감시하고 지원하는 데 집중되면서 정작 영향력이 막강해진 글로벌 기업은 사각지대로 방치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유럽연합이 `잊혀질 권리(Right to be forgotten)`를 법제화해 구글·페이스북 등 인터넷 서비스에서 만연한 사생활 침해와 개인정보유출에 적극 대응하는 것과 대조적이라는 것이다.
방통위 관계자는 “모바일 메신저 업데이트 문제는 국내 기업에서 문의가 들어오면 적극적으로 대응할 계획”이라며 “이번 기회에 플랫폼 중립성 등에 대해 쟁점화할 필요가 있지만, 이런 문제는 우리나라만 대응하면 공허하고 글로벌 차원에서 대응해야 하는 문제여서 한계가 많다”고 토로했다.
장지영·한세희·황태호기자 jyaj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