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영국 맨체스터대학교 실험실에서 2차원 구조 육각형 탄소화합물 ‘그래핀(Graphene)’이 발견(추출)됐다.
주역은 안드레 가임(Andre Geim) 교수와 그의 제자 콘스탄틴 노보셀로프(Konstantin Novoselov) 교수다. 두 교수는 마치 지문을 뜨듯 스카치 테이프 접착력을 이용해 흑연의 표면을 한 층씩 떼어내는 방식으로 그래핀을 추출했다. 그래핀이 지닌 특성 등 기초 연구를 폭넓게 진행해 두 교수는 2010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래핀은 탄소원자가 육각형으로 연결돼 벌집 모양 평면 구조를 이루고 있는 단층의 인공 나노물질이다. 과거 탄소 한 개 층으로 이뤄진 2차원 물질은 이론상으로만 존재했다.
주목할 점은 그래핀의 특성이다. 그래핀은 강철보다 100배 이상 강하고 열전도가 다이아몬드보다 갑절이나 높다. 전하이동도는 반도체 소재 실리콘보다 100배 우수하다. 반면에 두께는 머리카락을 1000만번 나눴을 때 나올 수 있는 2.2나노미터(㎚=10억분의 1m)에 불과하다.
우수한 물리적, 전기적 특성을 지녔기에 디스플레이와 차세대 반도체 소재 등 각종 산업에서 주목받는 ‘꿈의 신소재’로 불린다.
지난 9월 전자신문 창간 기념 석학대담에서 노보셀로프 교수는 그래핀을 ‘민주적인 소재’라 칭했다. 소재에 접근이 쉽고 응용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는 뜻이다. 노벨물리학상 수상 배경에는 그래핀 발견 이후 전 세계적으로 관련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된 점도 작용했다.
실제로 그래핀은 대량생산, 산화환원을 이용한 성질 변화, 응용기술 개발 여부에 따라 초고속 반도체, 투명전극, 나노구조체, 태양전지, 대용량 축전지 등 각종 첨단 분야에서 성능개선, 기술 상용화 등을 이룰 수 있다. 그동안 한계라 여겨지던 수많은 분야에 그래핀이 해결사로 등장한 셈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가 앞다퉈 그래핀 연구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이유다. 또 2015년 300억달러, 2030년 6000억달러 시장을 형성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도 쏟아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그래핀 발견 이후 응용기술 연구에서 가장 활발한 성과를 거두며 일약 그래핀 강국으로 부상했다. 여기에는 한국인 노벨상 수상 후보자로 거론됐던 김필립 교수와 그의 지도를 받으며 그래핀 연구를 시작한 홍병희 교수의 역할이 컸다.
김 교수와 홍 교수는 그래핀 연구로 대량생산 길을 연, 세계적인 그래핀 연구 리더로 주목을 받고 있다. 홍 교수는 지난해 세계 최초로 그래핀을 이용해 최대 30인치 그래핀 투명전극을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올해 들어 국내 크고 작은 그래핀 소재 기초 연구 및 응용기술 연구 성과는 50여건에 이른다.
KAIST와 포스텍, 울산과학기술대(UNIST) 등 이공계 특성화대학과 서울대, 성균관대 등 국내 주요 대학이 앞다퉈 그래핀 관련 전문 연구센터 및 팀을 설치했다. 이곳에서 그래핀 결정 규명, 구조해석, 관찰 신기술 개발 등 각종 연구 성과를 도출하며 그래핀 이론 해석과 응용연구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
세계 최초 30인치 그래핀 투명전극 제조를 비롯해 그래핀을 유기박막 트랜지스터(Organic Thin-Film Transistors) 전극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술, 그래핀을 이용한 나노고체윤활막과 비휘발성 메모리 소자가 개발됐다. 또 대용량 축전지 제조, 플래시 메모리 소자 성능과 신뢰도 향상, 플라즈몬 광도파 소자, 유기태양전지의 성능과 수명을 두 배 이상 향상시키는 기술 등이 모두 그래핀 기반 신기술이다.
특허청에 따르면 2004년 그래핀 발견 이후 국내 관련 특허출원은 서서히 증가하다 2009년부터 급증세에 있다. 2007년과 2008년에 각각 23건, 44건 출원에서 2009년 이후부터는 200건을 넘어섰다. 재료·제조(95건), 전자소자(51건), 전극(38건), 나노구조체(25건), 태양전지(18건), 디스플레이(10건), 조성물(23건) 등 출원 분야도 다양했다.
홍병희 교수는 “우리나라가 그래핀에 관심을 갖고 연구개발에 집중하자 세계에서 우리나라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며 “기초연구와 함께 산업화를 염두에 둔 연구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산업계의 그래핀 소재 끌어안기도 시작됐다. 삼성테크윈은 지난해 성균관대와 공동으로 화학증착방식(CVD) 기술을 이용해 전도성을 크게 높인 30인치 대면적 그래핀 합성에 성공했다.
포스코와 한화케미칼은 올해 초 미국 탄소나노소재 전문 연구기업인 XG사이언스 지분을 인수하고 그래핀 응용소재 개발 사업에 나섰다.
엔바로테크, 월드튜브 등 몇몇 중소기업은 특정 분야에 사용할 수 있는 그래핀 양산을 시작했다. 대학과 산업계를 중심으로 그래핀 연구가 활성화됐지만 정부 차원의 정책적 지원은 아쉬운 점이 노출됐다. 지경부 R&D전략기획단이 야심차게 추진해온 6대 R&D 선도기술 가운데 그래핀 연구가 제외된 것이다.
유럽에서는 1년에 1억유로씩 10년간 쏟아 붓는 그래핀 플래그십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IBM, 인텔, 바스프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도 그래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백종범 유니스트 그래핀 연구센터장은 “돌과 청동, 철의 시대를 거쳐 플라스틱과 복합소재 시대인 현재 이후에는 탄소와 그래핀의 시대가 될 것이다. 그만큼 그래핀의 응용은 무한하다”며 “그래핀은 원천기술이 취약한 우리나라가 기초부터 응용까지 세계를 이끌 수 있는 분야이므로 정부 차원의 대형 그래핀 연구 프로젝트를 하루빨리 앞당겨 시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부산=임동식기자 dsl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