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전력 산업이 고름을 짜내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난달 15일 정전사태 이후 사회 전반에 걸쳐 그동안 관행적 업무와 안일한 비상대응에 대한 질책이 계속되면서 전력 업계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 기막힌 우연처럼 정전사태 직후 찾아 온 국정감사로 그동안 우리나라 전력 산업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났다.
전력 업계는 침통한 표정이다. 사상 유례 없는 수요예측 실패와 과부화로 인한 정전사태에 자책과 자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기존의 사상누각을 허물고 튼튼한 기반을 새로 다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거세다. 이번 기회가 △에너지원 간 가격 왜곡에 따른 적자경영 구조 △전력그룹사 간 교통정리 △구시대적 업무시스템 개선 등 전력 산업의 고질병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무이의 기회라는 게 중론이다.
정전사태 이후 전력산업 개선을 위해 거론되고 있는 대책은 크게 △비상시 기관별 통합 대응체제 구축 △수요예측 및 수요관리 시스템 개선 △비현실적인 전기요금을 포함한 전력산업 구조 개선 3개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정부는 우선 총리실 주관으로 정전합동점검단을 구성해 정전사태를 수습하고 있다. 합동점검단의 주요 업무는 정전의 정확한 원인과 피해규모 파악, 기관별 협동체제 구축을 통한 재발방지 시스템 구축이다.
합동점검반은 지난달 26일 대책방안 발표를 통해 정전사태의 원인을 수요예측 실패·기관 간 정보 미공유·대국민 홍보지연으로 규정했다.
전력그룹사와 지경부 간 허술한 보고체계, 유관기관별 비상시 정보공유 및 협업라인 부재가 사태를 키웠다는 해석이다. 실제로 정전 당일 기상청의 폭염 특보에도 전력거래소는 이를 수요예측에 반영하지 않았고 늦은 정전상황 전파로 경찰과 소방관의 출동은 제때 이뤄지지 못했다. 전력그룹사와 지경부 간 보고도 혼선을 거듭했으며 그나마 주고받은 정보도 실제와는 다른 수치가 태반이었다.
정부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유사시 대비를 위한 지식경제부·전력거래소·한국전력·발전자회사 간 핫라인을 개설해 공조시스템을 확립할 계획이다. 공급예비력·운영예비력·주파수·전압 등의 정보 실시간 공유 시스템을 구성하고 경보발령시 소방방재청·경찰청 등 재난관리기관에 동시 통보한다.
위기대응 매뉴얼은 긴급매뉴얼과 일반매뉴얼로 나누어 대응한다. 전력관련 기관 간 매뉴얼을 통일해 기관 상호 간 위기대응 공조를 강화하고 재난방지 기관의 매뉴얼과도 일치시켜 연계성을 제고할 방침이다. 정전 보고 당시 문제가 되었던 ‘선조치 후보고’도 필요한 경우를 명확히 규정해 즉시 조치하도록 제도를 보완할 예정이다.
전력거래소와 한국전력은 전력 수요예측 시스템과 수요관리 운영체계를 재점검한다. 특히 주요 원인이었던 수요예측은 전력거래소와 한국전력이 공동으로 진행, 양측 예측치의 큰 차이가 있을 때는 상호 보정하는 이중 예측시스템 운용 등 전면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지금까지 5대 도시를 대상으로 진행해 온 최고·최저 온도 샘플링 범위를 8대 도시로 확대하는 등 온도변화에 따른 수요증감을 정확히 반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며 빠르면 연내 대체가 가능할 전망이다.
수요관리제도는 정전 당시 계약자의 참여율이 35%에 불과했던 만큼 지원금 확대를 통한 자원 추가 발굴과 참여율 증대로 개선 방향을 잡고 있다. 그 일환으로 일반용·소규모 전기사용자 대상 수요관리자원 발굴과 인센티브 차등 부여 등을 검토하고 있다.
특히 인센티브 이외에 전기요금 체계 개선을 통해 수요를 줄이는 요금기반 수요관리제도 도입방안도 강구하고 있다. 실시간 가격정보 제공으로 합리적인 소비패턴을 유도하는 ‘실시간 요금제’와 최대 피크시간에 높은 요금을 적용해 사용량 감축을 유도하는 ‘피크억제형 요금제’가 대표적이다. 비상시 긴급단전 순위는 단전 1순위 대상이 소규모 주택 및 상가에서 비상발전기를 보유한 단독선로 시설로 대체하는 등 대상·적용기준·차단방식을 개선한다.
발전자회사 별로는 전력공급량 오차 최소화와 계획예방정비 일정을 손본다. 실시간으로 입찰 공급능력과 실제 발전능력 간 차이를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예비력 산정시 공급능력 간 평균오차를 반영해 과대계상을 방지할 예정이다. 이번 정전시 입찰한 전력공급량 만큼 전력을 제공하지 못한 발전사들은 원인을 규명하고 오차가 클 경우 상응하는 제재조치가 가해질 전망이다.
정치권에서는 전력산업 구조 통합 및 전기요금 현실화를 촉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발전과 송전·계통운영·배전과 판매가 분리된 지금의 전력구조를 유지한 채로는 정전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는 의견이다.
지난달 23일 전력그룹사 국정감사도 많은 국회의원들이 전력산업 구조 통합을 성토하는 장이었다. 정태근 한나라당 의원은 다른 의원들과 합의를 통해 전력산업 구조 통합 법안을 공식적으로 발의할 계획이다.
전기요금 현실화는 산업용 요금을 타깃으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상대적으로 저렴한 산업용 전기요금을 사용하고 있는 대기업들이 정전 당시 자율절전 및 직접부하제어 요청을 외면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대기업에 대한 전기요금 혜택을 중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부 역시 전기요금을 원가에 기반을 둔 체계로 개편해 에너지 절약을 유도한다며, 전기요금 현실화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전력 수요의 관리 강화를 위해 전기 요금에 원가를 반영하도록 단계적으로 접근하고, 유보 중인 연료비연동제와 계절별·시간대별 차등요금제 강화 등 요금체계 개선을 진행할 방침이다.
정부는 이번 정전사태를 계기로 가스·상수도·통신 등 여타 국가기간망에 대한 위기관리 대응체계도 관계부처 합동으로 점검·보완해 나갈 예정이다.
조정형기자 jeni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