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기자동차 확산 등 앞으로 소비자가 쓰는 2차 에너지의 대부분을 전기가 맡게 될 것입니다. 그때 판매경쟁을 통해 소켓에 꽂느냐, 지금과 같은 독점구조의 소켓에 꽂느냐를 생각해보면 답은 명확해 집니다. 전기도 경쟁과 개방을 통해 품질과 시장성, 경쟁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염명천 전력거래소 이사장은 30년에 가까운 공직 생활을 한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시장주의자’다. 경쟁으로 가야만 민간투자가 생기고,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소비자 선택권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발전 쪽은 시장형공기업으로서 경쟁체제로 가도록 정해졌으니, 판매부문에도 민간자본이 들어올 수 있도록 기반과 여건을 마련하는데 내년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우리나라 통신 산업의 역사가 말해주 듯, 정부 독점으로 민간과 경쟁하지 않고는 성장도 없고, 기술 발전도 없습니다.”
그는 앞으로 경쟁구도에 관해 국영기업과 민간기업 각각의 숫자까지 거론하며 구체화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국영기업이 완전히 손을 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으며, 민간 대 정부기업의 비율이 3분의 1 또는 4분의 1 정도가 적당하다고 했다.
“7개 판매회사가 있다면 2개 정도는 정부가 갖고 있어야 합니다. 민간에서 5개 기업 정도가 참여한다면 어마어마한 새 시장이 열릴 것입니다. 스마트그리드 전환에도 속도가 붙을 것이고, 관련 전력 기자재·부품·설비 산업도 함께 커질 것입니다. 그런 변화의 핵심 키는 민간이 쥐고 있습니다. 전력구조개편에 따른 실행 방안을 촘촘히 점검하면서 실천에 옮기는 것과 함께 민간 참여의 물꼬를 열어주는게 중요합니다.”
염 이사장은 지난 4월 오랜 공직생활을 떠나 전력거래소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신념 같은 소명의식을 늘 가슴에 품고 다닌다. 전력거래소가 안고 있는 다섯 가지 임무다.
첫 번째는 어떤 경우라도 전력공급에 문제가 생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전기가 주도하는 미래 에너지사회에 대한 준비다. 스마트그리드·신재생에너지 의무할당제(RPS)·배출권거래제 등에서도 전력거래소가 주도적인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전력시장과 계통 업무의 업그레이드라는 기본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약속이다. 경쟁을 통해 전력시장이 활발하게 움직이도록 시장기능을 제고하고, 차세대 전력IT시스템을 제대로 구축·운영해 세계최고 수준의 전력IT 성과를 내겠다는 전략이다.
네 번째, 회원사와 고객 지향적인 서비스 마인드를 갖추고, 조직과 시스템을 끊임없이 개선시켜 나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통과 파트너십에 기초한 미래지향적인 노사문화를 만들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들 다섯 가지 미션을 충실하게 실천한다면 전력거래소가 대한민국 에너지시장의 중심에 서서 전력산업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얻을 것이라 믿습니다. 전력시장은 국가경제와 국민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합니다. 그런 만큼 중심을 잡고 미래를 향해 뛸 수 있는 조직문화와 역량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취임 후 8개월 동안 숨 가쁘게 달려오면서 만든 가장 큰 성과로는 역시 여름철 전력피크를 무사히 넘긴 것과 적극적인 수요관리를 통해 예비전력을 확보했다는 점을 꼽았다. 하루, 한 시간 단위 수요전력 절감량 입찰 제도를 더욱 확대해 올 겨울철 전력수요 관리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생각이다.
염 이사장은 제주 스마트그리드 실증단지 사업에서도 강한 추진력으로 눈에 띄는 성과를 이뤄냈다. 전력시장과 전력계통 분야에 축적된 기술과 노하우를 쏟아 부어 스마트그리드 실증단지 통합운영센터(TOC)를 구축한 것이다.
“스마트그리드 TOC는 크게 시장운영과 계통운영 기능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시장운영 측면에선 가격 입찰제도 도입을 통한 양방향 전력거래 환경을 조성했으며, 실시간 전력시장 구현으로 5분 단위 실시간요금(RTP) 신호를 제공합니다. 특히 계통보조서비스(AS)시장을 개설하는 등 혁신적인 전력시장 모델을 만들어 실증하고 있습니다. 계통운영 차원에선 실증단지 내의 실시간 급전운영과 전력 계통에 대한 총체적인 감시·제어가 가능합니다. 또 신재생발전원의 실시간 출력 예측기법을 개발해 적용했으며, 분산전원의 계통접속 기준 개발 등 새로운 운영기법을 쓰도록 한 것도 큰 성과입니다.”
요즘 염 이사장이 최대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겨울철 전력의 안정적 공급이다.
지난해 겨울, 여름보다 피크치를 570만㎾ 이상 초과하면서 연중 최대 수요철이 됨에 따라 올 겨울 역시 사상최고치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고시한 대로 올 겨울철 전력공급 능력을 7724만㎾ 수준까지 확보해, 수요 예측치 7250만㎾에 비해 474만㎾의 예비 전력을 갖추겠습니다. 신규 발전기 확보, 복합화력 출력 향상 등 공급능력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철저한 수요관리를 통해 사용자 부분에서 전력을 아끼고 스스로 줄일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데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내년부터 전력산업구조 개편이 본격 시행됨에 따라 전력거래소가 뒷받침해야할 일도 적지 않다. 이사장을 맡기 전인 지난 2008년 전기위원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업무 준비 정도와 이해도는 누구보다 높다.
“전력시장 선진화와 관련해선 양수발전소의 한수원 이관에 따른 시장규칙을 재정비해야하고, 직접구매사업 활성화를 위한 기반적 조치도 수립, 시행해야 합니다. 이와 함께 현 전력시장 가격 왜곡의 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계통한계가격 가격보정계수 제도를 손질하고, 스마트그리드 확대와 병행한 수요 측 입찰 도입과 실시간 시장 개설도 준비할 것입니다. 이외에도 발전소 RPS 시행·배출권 거래제 등 시장기반의 녹색제도와 전력시장이 효과적으로 연계·작동할 수 있도록 각종 제도를 정비하는 등 경쟁 활성화를 위한 다각적인 개선 노력을 전개할 방침입니다.”
지난 3일 집무실에서 만난 염 이사장은 한 시간을 훌쩍 넘긴 인터뷰 시간 내내 적극적인 화법과 힘 있는 목소리로 분위기를 압도했다. 특히 전력시장 진화 방향에 대해선 명확한 생각과 비전을 갖고 있었다.
시장의 중재자가 아닌 시장 변화의 주도자로, 전력 거래체계 선진화의 설계자로 염 이사장은 오늘도 뛰고 있다.
◆염명천 이사장은?
‘전력시장 이론의 대가.’
전력거래소 직원들 사이에서 염 이사장은 ‘깊이가 다른 실력자’로 통한다. 대화에서든, 토론에서든 직원들은 염 이사장의 이론적 준비와 내용, 깊이에 압도당한다. 전력거래소 밖, 전력업계에서도 염 이사장은 ‘천재적 전략갗로 명성이 높다.
염 이사장은 광주 제일고를 나와 81년 행정고시 24회에 합격, 동력자원부 사무관으로 임용됐다. 이어 동력자원부와 상공부가 통합된 산업자원부에서 정보화담당관, 석탄과장, 수입과장, 석유과장, 시장개척과장 등 여러 보직을 두루 거치며 에너지·자원분야 정책기획력을 쌓았다.
2007년 산업자원부 기후변화기획관을 거쳐, 2008년 전기위원회 사무국장, 2009년 지식경제부 지역특구기획단장을 거쳐 올해 4월 전력거래소 이사장에 취임했다.
도시행정학으로 학사를 마친 뒤 서울대 행정학 석사, 미국 미시건대 경제학 박사, 서울시립대 법학박사 등 다양한 학문분야를 거치며 이론적 깊이를 더했다.
전기·전력을 포함한 에너지·자원 전 분야에 걸친 대표적인 정책 기획통으로 정평이 나있다.
◆전력계통운영시스템(EMS) 기술 독립 이뤄냈다
올해는 우리나라 전력계통 관리·운영에 있어서도 신기원을 연 해로 기록될 전망이다. 국가 전체 전력설비 및 계통에 대한 관리·제어시스템인 계통운영시스템(EMS:에너지관리시스템)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자체 개발한 나라로 도약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뛰어난 자체 정보기술(IT) 능력과 전력계통 운영 경험에도 불구하고 발전소·송전망·변전소·배전망에 이르는 전력설비를 종합적으로 관리, 제어하는 핵심설비인 EMS를 아레바 등 외국에서 들여와 10년째 운용해 왔다.
이 같은 EMS가 지경부와 전력거래소 주도로 완전한 기술독립을 이뤄냈다.
우리나라 전력산업이 양적 성장과 기술적 고도화로 해외시장에서 선진국의 전력산업과 직접 경쟁해야하는 상황에서 EMS 관련 원천기술과 응용기술의 자체 확보는 무엇보다 중요한 숙제였다.
정부는 이 같은 국가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 2005년부터 한국표준형 EMS(K-EMS) 연구개발 사업을 전력IT 국가전략과제로 선정, 자체 기술 확보를 추진해왔다.
전력거래소를 총괄기관으로 한전KDN·한국전기연구원·LS산전 등 15개 기관이 산학연 컨소시엄으로 참여해 기술 개발에 매진해왔다. 5년간 총 399억원, 연인원 260명 이상의 박사급 연구진이 투입돼 ‘K-EMS’를 개발해 냈다.
전력거래소가 1500시간의 가동률 시험을 진행한 뒤 실 계통 운전에도 성공함으로써 EMS 설계·제작, 운영, 유지보수의 일괄 수행 체제가 확립됐다.
전력거래소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선진화된 계통운영 시스템을 자체 제작하고, 필요한 기술을 자력으로 확보함으로써 경제성 확보는 물론 전력산업의 해외시장 개척에서도 큰 힘을 얻게 됐다”고 설명했다.
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