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획] 부상하는 거대 중화 경제권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 2010년 한국과 대만의 대중국 수출 상위 10대 품목

지난 7일 오전 대만 타이베이 무역센터에서 열린 `제35차 한-대만 경제협력위원회 합동회의`. 이 자리에서 한국측의 전경련 대표단은 다소 이례적으로 전자부품을 주요 의제로 올렸다. 한국과 대만이 전자부품 분야에서 표준화와 원재료 공동 구매 등 양국간 협력을 강화하자는 제안이었다. 더 나아가 경쟁력 있는 전자부품은 양국이 공동 브랜드화도 추진해 글로벌 시장에 함께 진출하자고도 했다. 당시 강태순 위원장(두산 부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중국과 대만의 경제협력기본협정(ECFA) 체결은 한국 경제와 산업에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면서 “ECFA를 계기로 한국과 대만의 협력관계도 더욱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향`이라는 낮은 톤의 표현을 썼을 뿐, 한국 기업들에겐 ECFA 체제가 `다급함`으로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특히 중국 시장에서 우리와 정면 경쟁을 펼치고 있는 전자 산업은 더 위기감을 드리운다. ECFA 체결후 한국과 대만 기업들인들의 첫 만남이 전자부품을 주제로 다룬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양안 경제 협력의 기본 틀인 ECFA가 체결되면서 거대 `차이완 파워`가 가시화하고 있다. ECFA는 양안간 정치적 훈풍을 타고 이뤄진 차이완 경제 통합의 상징적 사건이라는 시각이다. 장기적으로는 경제 `국공합작`에 가까운 위력을 발휘할 정도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다. 홍콩과 중국이 체결한 포괄적 경제동반자 협정(CEPA)보다 높은 수준의, 사실상 자유무역협정(FTA)에 가깝기 때문이다.

ECFA의 목적은 중국과 대만이 상호 경제적 이익 확대를 통해 중화 경제권의 영향력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으로서는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경제 체제에서 중화민족의 힘을 확대하겠다는 전략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대만은 안정적인 시장을 확보하는 측면이 크다. 중국이 다른 나라들과 FTA를 체결하는 상황에서 대만이 1위 교역국이자 G2 경제대국인 중국을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다.

양국간 ECFA 체결로 인한 경제 통합의 효과는 당장 수치에서 두드러진다. 중국과 대만의 GDP 규모를 합치면 지난해 기준으로 5조2878억달러에 달했다. 전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13.5%에 이른다. 세계 시장에서 중화 경제권의 영향력 확대가 자연스럽게 예상되는 대목이다. 전 세계 금융 시장에서도 막강한 파워를 발휘할 것으로 점쳐진다. 중국과 대만의 외환 보유고는 지난해말 기준 2조7474억달러, 올 들어서는 2조8000억달러대까지 상승했다. 이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지속적인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 채권 보유액도 중국과 대만을 합치면 지난해말 현재 1조5771억달러로, 전체 미국 채권 시장 총액 9조6410억달러의 16.4%를 차지했다. 차이완의 막대한 외환 보유고와 미국 채권 보유액은 국제 금융 시장도 좌우할 수 있는 요인인 셈이다. 금융 부문에서는 대중국 의존도도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다. 중국은 통화스왑 체결을 통해 역내 금융 시장은 물론이고 세계 금융 시장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무역 거래시 위안화 결제 확대도 추진중이다. 한국의 경우 무역 거래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20%를 넘는 가운데 위안화 결제 비중이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금융 부문의 대중국 의존도가 심화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ECFA의 가장 큰 위협요인은 무엇보다 대중국 수출 경쟁이 격화된다는 점이다. 이번 협정의 가장 핵심으로 꼽히는 조기수확 품목, 즉 중국이 대만에 관세 혜택을 주는 품목이 무려 539개에 달한다. 지난해 기준 대만의 대중 수출액은 837억달러, 중국의 평균 수입 관세율은 9%이다. 대만의 평균 수입 관세율이 4% 정도라는 점에서 ECFA가 발효되면 대만 기업들이 누리게 될 관세 인하 효과는 클 수밖에 없다. 관세 혜택 뿐이 아니다. 중국에 진출한 대만 기업들은 여타 경쟁국 기업들에 비해 우호적인 경영 환경을 맞이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중국 진출 대만기업은 중국 법률인 `대만동포투자보호법`에 적용받지만, ECFA가 발효되면 투자 보장까지 약속받게 되기 때문이다.

중국과 대만은 향후 산업 · 기술 기준을 설립하고 에너지 · 철강 · 통신 업종의 국영 기업들간 전략적 동맹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통해 세계적인 수준의 기업들로 발전시킨다는 야심이다. 특히 IT 산업의 경우 중국의 자본력과 대만의 기술력이 만나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거대 연합군을 형성할 전망이다.

중국 시장에서 한국과 경쟁하는 대만 기업들은 당장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현재 국제통일상품분류체계(HS) 4단위 기준으로 한국과 대만의 대중국 수출 상위 20개 품목 가운데 경합을 벌이고 있는 품목은 무려 14개에 달한다. 우리나라 중국 수출액의 약 60%를 차지하는 방대한 시장에서 위협을 받게 되는 셈이다. 한국과 대만의 대중국 수출 상위 15개 품목만 추려 보면, 역시 이 가운데서도 10개 품목에서 경쟁하고 있다. 더욱이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인 반도체 · LCD · 인쇄회로기판(PCB) 등은 이미 대만이 중국 시장에서 더 높은 점유율을 기록중이다. 석유화학 제품은 한국이 대만에 비해 경쟁 우위에 있으나 ECFA 체결로 조기수확 품목에 포함되면서 역시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ECFA에 따른 관세 인하 조치로 대만과 비교한 대중국 수출 가격 경쟁력에서 우리나라는 힘겨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근래 들어 대만의 에이서 · 아수스텍 · HTC 등 PC · 휴대폰 업체들은 지금까지 `위탁생산` 기지라는 멍에를 벗고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고 있다. 대만의 협소한 내수 시장 탓에 그동안 발전하지 못했던 태양광 · 자동차 등의 산업도 중국을 발판으로 경쟁력을 키워가며 한국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ECFA 체제의 출범에 맞서 우리나라 주력 수출품들의 기술력을 한층 강화하는 한편, 새로운 녹색 산업에서 대중국 수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와 함께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과 FTA 체결을 가속화하고, 차이완 자본의 국내 투자 활성화도 유도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다. KOTRA 관계자는 “우리 기업들이 대만 기업과 협력을 통해 중국시장에 공동 진출하거나, 대만의 경쟁기업과 상호지분투자 및 합작기업 설립 등 종전과 다른 협력 모델을 발굴하는 노력도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한기자 hse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