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대기업을 중심으로 문서혁신이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공인전자문서보관소(이하 공전소) 사업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기업이 문서혁신을 통해 기존 종이문서를 전자문서로 대체해 나가면 전자문서 유통이 활발해지게 된다. 공전소 사업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요 공전소 사업자들은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과연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기업의 문서혁신이 공전소의 새로운 활력소가 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전자문서가 종이문서를 대체해 생산, 유통되고 있지만 여전히 종이문서가 보관되고 있다. 그리고 공전소에 보관되는 전자문서는 늘어나지 않고 있다.
지난 2006년 산업자원부(현 지식경제부)는 유비쿼터스 페이퍼리스 구현을 위해 공전소 제도를 세계 최초로 도입한다고 밝혔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기업별로 많게는 수십억원을, 국가적으로는 수천억원대의 비용절감 효과를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공전소를 이용하면 문서로 인한 법적 갈등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공전소 제도가 도입된지 만 3년이 지났지만 현재 공전소를 이용하고 있는 기업은 총 30개도 안된다. 이중 LG CNS가 이용 기업으로 확보하고 있는 신용카드사와 공전소 운영업체의 계열사를 제외하면 사실상의 공전소 외부 고객은 10개도 안된다.
◇“공전소? 처음 듣는 개념인데…”=하이닉스반도체는 지난 2008년 11월부터 2009년 12월까지 대대적인 문서혁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문서혁신에는 문서업무 효율화를 위한 페이퍼리스 구현도 목표 중 하나였다. 그러나 하이닉스반도체는 모든 문서에 대한 페이퍼리스를 구현하지는 못했다. 이는 문서혁신을 통해 전자문서를 생성하고 있지만 여전히 법적 효력을 필요로 하는 종이문서는 별도로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성된 전자문서는 공전소 아닌 자체 서버에 보관하고 있다. 하이닉스반도체의 한 관계자는 “공전소에 전자문서를 보관하는 방안에 대해 검토는 해봤지만 반도체 업종의 특성상 보안문제 때문에 실행하지는 못했다”면서 “현재 법적으로 전자문서가 완벽하게 효력을 인정받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현재로서는 추진을 보류한 상태”라고 말했다.
LG디스플레이, 포스코 등도 문서혁신을 실시했지만 페이퍼리스를 구현하지는 못했다. 단지 종이문서를 줄이는 성과만 얻은 것이다. 계약서 등 중요 문서는 반드시 종이로 보관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또 공전소 이용 타당성을 검토한 결과 투자대비효과(ROI)가 미흡하다고 판단했다. 심지어 문서혁신을 추진한 한 기업의 최고정보책임자(CIO)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공전소라는 개념을 처음 듣는다고 답하기도 했다.
문서에 따른 법적 분쟁 요인이 많은 금융권에서도 공전소 이용을 통한 페이퍼리스는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전자거래기본법 등에서 전자문서의 법적효력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실제 금융감독원 등의 감독 지침으로 인해 대부분 종이문서를 별도로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병원 등도 전자차트를 통해 전자문서를 생성하고 있지만 역시 보건당국의 감독지침으로 인해 대부분 종이문서를 따로 보관하고 있다. 공공기관의 경우도 페이퍼리스를 구현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낮은 ROI와 상충되는 감독규정이 문제=이처럼 대부분의 기업과 기관이 공전소를 외면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비용적인 측면이 강하다. 기업이 공전소를 통해 페이퍼리스를 구현한다면, 가장 큰 이유는 비용절감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가격구조로는 비용절감을 모색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재 공전소 이용 보관비는 종이 한장에 해당되는 전자문서 한개 파일당 평균 연 80∼100원 정도다. 종이문서 한 장을 보관하는 데 평균적으로 드는 비용인 10원보다 무려 8배에서 10배 가량 비싸다.
이처럼 비용이 높은 원인에 대해 공전소 사업자들은 아직 본격적으로 경쟁이 이뤄지지 않아 경쟁에 의한 시장 가격이 형성되지 못한 것도 이유이지만, 그보다 공전소 환경을 갖추기 위해 구축해야 할 인프라 비용이 너무 많이 소요되기 때문이라고 토로하고 있다. 특히 웜(WORM)기반의 고사양 스토리지를 도입해야 하고 3중화 체계를 갖춰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더욱이 기업이 공전소에 문서를 위탁하려 할 경우 내부 문서관리시스템과 공전소시스템을 연동해야 하기 때문에 별도 시스템구축(SI) 비용도 필요하다. 여기에다 기존 종이문서를 스캐닝하게 될 경우 별도 비용이 추가된다.
이에 대해 공전소 한 관계자는 “법적 분쟁 비율이 낮은 문서에 대해서도 높은 비용을 들여 최고의 보안등급으로 문서를 보관해야 하는 현 상황에서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공전소 이용을 꺼릴 것”이라며 “공전소에 적용되는 기술규격을 문서 중요도에 따라 여러 등급으로 차등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시스템의 성능적인 측면도 문제가 되고 있다. 문서관리시스템을 통해 전송되는 문서는 총 16개의 프로세스를 거쳐 보안이 적용되기 때문에 속도 면에서는 성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기업이 공전소에 전자문서를 위탁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전자문서에 대한 법적효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다. 그러나 상충되는 법·제도로 인해 현실적으로 법적 효력을 인정 받는 데 한계가 많다. 지난 2007년 처음 공전소 운영이 시작됐을 때에 비하면 상충되는 법·제도들이 많이 정비된 상태지만 아직도 여러 법·제도에서는 종이문서를 별도로 보관하도록 하고 있다. 실제 국세기본법, 상법, 민사소송법, 우편법 등의 법령과 시행규칙에서 종이문서를 전자문서보다 우선시 하거나 종이문서를 따로 보관하도록 하고 있다. 전자문서에 대한 기업 경영진의 마인드가 부족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제조 및 금융사 등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문화를 지닌 기업들의 경영진은 반드시 종이문서를 유통하거나 보관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비용 현실화 및 인센티브 도입해야=문서혁신을 추진한 기업이든, 공전소 사업자든 전자문서를 공전소에 보관해 페이퍼리스 구현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업들에게 그만한 혜택을 줘야한다고 입을 모은다.
먼저 ROI가 확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문서 위탁 비용을 낮추거나 중요성이 떨어지는 전자문서는 저렴하게 보관할 수 있도록 가격을 등급별로 차등화하는 방안이 제시되고 있다. 적어도 종이문서를 보관하는 비용보다는 저렴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이문서를 보관하도록 하는 감독 지침이나 관련 법령 등도 하루빨리 개정해야 한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아무리 전자거래법을 통해 전자문서 효력을 법적으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감독당국이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서 “법개정도 좋지만 감독당국의 지침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종이문서에 집착하는 기업의 문화나 관행도 바뀌어야 한다. 특히 경영진부터 페이퍼리스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한 제조업체 관계자는 “내부에서 페이퍼리스를 구현했다는 말 조차 꺼내지 못한다”면서 “경영진들은 종이를 완전히 없애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다”고 전했다. 이외에도 정부가 나서서 페이퍼리스를 구현한 기업 및 기관에게는 인센티브를 부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신혜권기자 hk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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