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걸리가 2009년 최고 히트상품 반열에 올랐다. 트림과 숙취, 서민들의 값싼 술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떨치고 건강과 미용에 좋은 전통주로 새롭게 조명받은 올해, 막걸리는 시장에서 그야말로 상한가를 쳤다.
대한민국은 막걸리에 흠씬 취했고 주류 시장의 판도를 흔들었다. 막걸리를 활용한 한국식 칵테일과 컨셉트 주점이 인기를 끌고 보졸레 누보의 출시일에 맞춰 햅쌀로 빚은 막걸리 누보까지 등장했다. 막걸리 열풍은 불황에 값싼 술을 선호하는 일시적 유행일까 아니면 향후 10∼20년 지속될 트렌드일까.
지난 9일 미래학연구회인 서울퓨처스쿨(S.F.S)은 ‘막걸리 붐, 유행인가 트렌드인가?’란 주제로 이색 토론을 벌였다. 행사는 막걸리 붐이 일시적이라는 유행팀과 지속적이라는 트렌드팀으로 임의로 편을 나눠 막걸리의 미래를 예측해 봤다.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막걸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유지되려면 정부와 제조자, 소비자의 고정관념부터 바꿔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트렌드팀(T)
장기철 막걸리바 친친 대표
김준호 옵티마컨설팅 이사
유행팀(Y)
이지현 연세대 생활디자인 학과 교수
류현정 전자신문 객원기자
김민주 리드앤리더 대표
◆막걸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술인가.
◇이지현 연세대 교수=요즘 막걸리 붐은 반가운 현상이지만 일본 관광객이 우리 막걸리의 가치를 재발견한 주역이란 점에서 한계가 보인다. 고객들도 막걸리의 맛을 좋아하기보다는 단순히 향수를 소비하고 있어서 단기적 유행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우리 내부에서 막걸리의 품질 관리체계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는데 한류상품으로 거듭나기에 한계가 있다.
◇류현정 기자=우리나라 상위 20개 막걸리 제조사 중에서 10% 정도만 국산 쌀을 쓴다는 조사가 있다. 우리 쌀이 아니라 중국 쌀로 누룩을 만든 막걸리가 한국을 대표하는 술이 되기에는 어렵지 않겠나.
◇장기철 친친 대표=일부 공감한다. 좀 과장됐지만 막걸리 주재료인 쌀의 상당수가 수입산이란 사실은 심각하다. 미국 쌀로 빚은 일본의 사케, 미국산 포도로 만든 이탈리아 와인은 들어본 적이 없다. 막걸리가 진정한 한국의 술이 되려면 무조건 100% 국산 쌀과 물로 만들어야 한다. 막걸리 원가는 크게 오르겠지만 잘못된 주세제도를 고치면 시장에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김민주 리드앤리더 대표=막걸리 붐은 경기사이클의 하강국면에서 나왔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불경기에는 소비자가 와인, 양주보다 값싼 주류를 찾게 마련이고 막걸리가 우연히 부각된 것이 아닌가. 경제학적 관점에서 막걸리는 불경기가 돼야 잘 팔리는 열등재에 해당한다. 일본의 사케는 오랜 노력을 거쳐서 우등재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앞으로 경기가 회복될 때도 막걸리가 한국 소비자에게 여전히 매력적일지, 또는 와인, 고급양주로 되돌아갈지 더 두고봐야 한다.
◇이지현=막걸리를 해외에 소개하려면 우리부터 준비해야 할 일이 많다. 생막걸리는 효모와 유산균이 살아 있어 장기간 보관이 어렵고 해외수출에 제약이 따른다. 최근 막걸리 양조기술이 크게 발전됐다지만 학계와 정부의 관심이 더욱 필요하다. 와인의 소믈리에, 사케 전문가인 기키사케시처럼 우리나라도 막걸리의 종류를 국내외 손님들에게 쉽게 소개할 수 있는 전문인력 양성이 필요하다.
◆막걸리 마케팅, 발상의 전환 필요.
◇류현정=요즘 술은 취하기 위한 음료가 아니라 문화상품이기도 하다. ‘신의 물방울’과 같은 일본만화 덕분에 국내에서도 와인 붐이 일지 않았나. 막걸리와 관련해서 한국특유의 문화적 자산이 아직 축적되지 않은 것 같다. 요즘 한식의 세계화가 관심을 끄는데 막걸리가 세계화되려면 문화 콘텐츠가 필수적이다. 또 막걸리 발효과정에서 한국만이 가진 독특한 노하우나 기술력, 재료 우위가 없다면 중국, 동남아에서 만든 막걸리가 세계시장을 휩쓸 수도 있다.
◇장기철=쌀은 지난 3000년 이상 청주·탁주·소주 등 우리나라 술의 핵심재료였다. 서양식 맥주, 양주를 마시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에 형성된 오늘날 한국의 주류문화는 매우 이례적이고 역사가 짧은 현상으로 봐야 한다. 막걸리를 마시는 것은 새로운 트렌드가 아니라 한국인의 몸에 가장 잘 맞는 쌀로 만든 술, 우리 주류문화의 원형으로 되돌아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재료의 고급화만 이뤄지면 국내 막걸리 양조기술은 외국과 충분히 차별화된다. 요즘 출시되는 고급 막걸리를 마셔봤나. 과거 저급재료를 쓰던 막걸리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샴페인 수준의 청량감에서 은은한 바닐라 향까지 풍미가 다양하다.
◇김민주=영세한 양조장에서 만든 막걸리는 아직도 품질이 균일하지 못한 사례가 있다. 서양에서는 수도원에서 와인 제조가 오랜 세월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독일 맥주는 호프와 보리, 물만으로 만든다는 맥주순수령이 유명하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막걸리 양조과정은 아직도 시스템화되지 못했다. 쌀로 빚은 술의 전통은 일본과 중국도 매우 깊고 다양하기 때문에 체계적인 막걸리 홍보전략을 세워야 한다.
◇이지현=막걸리가 트렌드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선결조건이 있다. 대기업이 막걸리 시장을 과점하지 않도록 정부차원의 행정지도가 꼭 필요하다. 우리나라 주류시장을 좌우하는 대기업이 막걸리 시장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해하지만 막걸리 양조는 태생적으로 중소기업에 적합한 업종이다. 맥주시장처럼 두세 브랜드가 장악하는 대기업 논리로는 막걸리의 다양한 풍미를 제대로 살릴 수 없다. 대기업이 유명한 지역 막걸리 양조장을 통째로 구입해도 맛과 전통이 유지되기 힘들다.
◇장기철=막걸리가 고급술이 되려면 맥주(72%), 양주(72%)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막걸리의 주세(5%)를 높여야 한다. 막걸리의 주세가 낮은 것은 서민들이 마시는 술이라는 시각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상품은 일정 수준의 가격을 유지해야 품질을 유지할 수 있다. 막걸리에 대한 정부의 왜곡된 시선이 지난 수십년간 막걸리를 저급술로 만든 핵심 배경이 됐다. 앞으로 먹는 것의 아름다움을 정부가 빼앗아서는 안 된다.
◆막걸리도 디지털이다.
◇김준호 옵티마컨설팅 이사=과거 산업사회의 주류문화는 저렴한 가격에 효율적으로 취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희석식 소주가 대세였다. 현재는 정보화 시대기에 언제, 어디서 누가 만들었는지를 따지는 와인이 인기를 끈다.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막걸리의 특성은 21세기 미래사회의 감성 트렌드와 일치한다고 본다.
◇장기철=막걸리를 앞선 감성을 가진 오피니언 리더들이 마시는 술로 자리 잡게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이폰으로 고급 막걸리를 쉽게 주문하는 애플리케이션도 나왔다. 열정과 노력이 있으면 막걸리도 디지털이 된다. 막걸리의 해외진출에 대해서 질문을 하겠다. 막걸리를 해외시장에서 어떤 브랜드로 팔아야 잘 팔릴 것 같은가.
◇류현정=해외시장에서 막걸리에 대한 명칭이 라이스와인(rice wine), 마코리(Maccori), 막걸리(Makgeoli) 등 중구난방인 것으로 알고 있다. 막걸리가 일본 사케, 중국술의 한 종류로 오해받지 않으려면 관련업계의 공통된 합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장기철=해외시장에서 막걸리가 한국산이란 사실에 너무 집착하면 실패하기 쉽다. 이미 해외시장에 뿌리내린 일본술, 중국술의 이미지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외국 사람들에게 막걸리를 마시게 한 뒤에 ‘밀키 사케’(milky sake), ‘클라우디 사케’(cloudy sake)라고 설명해주면 아주 비싼 가격에도 기꺼이 구매한다. 생소한 막걸리란 단어 대신 뿌연 사케라고 설명하면 훨씬 쉽고 마케팅에 유리하다. 일본술 사케도 경상도 방언인 ‘삭히다’에서 나왔다. 미국 할리우드의 유명배우들이 한국산 막걸리를 즐겨 마시기 시작하면 막걸리는 분명히 트렌드가 될 것이다. 막걸리의 단점을 꾸준히 보완하고 새로 자리 잡는 노력을 지속한다면 미래 막걸리는 와인, 보드카와 경쟁할 수 있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