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0대 소프트웨어(SW)기업 중 하나인 A회사의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정부 관계자와 SW업계 CEO 대표가 모인 자리에서 분리발주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A CEO는 “분리발주 의무화 조치에 따르면 대기업이 들어올 수 없는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업 수주에 실패하고 대기업이 해당 사업을 수주했다”며 “국내 SW업계에 공공시장은 생명줄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중소기업이 대부분인 SW업체는 공공시장에서 체력을 키우고, 대기업은 해외로 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반면에 국내 SW업체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유럽 현지에서 이를 악물고 뛰고 있는 B회사 사장은 “해외에서 한국SW 시장의 인지도는 1980년대 삼성TV를 생각하면 된다”면서 “국내에서 이름이 알려진 SW업계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눠 보면 이 사람들이 수출에 관심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국내 시장에서 먹고살 만한 현실에 안주하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10·20년 전에 꿨던 ‘IT강국 코리아’의 꿈은 냉정한 현실인식이 선행됐기에 이루어졌다. 전문가들은 SW강국 코리아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 이전에 기업 스스로 생존력을 높여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기업가 정신을 회복하라”=척박한 환경을 뚫고 해외 수출을 달성한 기업에는 공통점이 있다.
공공보다는 민간 부문에서 보다 많은 레퍼런스(실적)를 쌓았고 해외기업과 정면승부를 걸 수 있는 품질이 있으며, 어떤 고난을 뚫고서라도 수출을 하겠다는 기업가 정신이 있다.
그러나 이런 기업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씁쓸한 지적이 이어진다.
한 SW업계 CEO는 “아직도 SW업계는 국가적인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하지만, 그간 정부가 SW업계를 지원 안 한 것은 아니다”면서 “정부가 던져주는 사탕이 독인 줄 모르고 품질관리 등 기초체력을 다지는 데 소홀했던 게 사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어 “국내 투자 유치를 위해 실현 의지도 가능성도 없는 수출계획을 마케팅 요소로 이용하는 기업도 많다”고 덧붙였다.
그는 “국내 50대 SW기업 중 수출실적이 없는 기업들은 기술력이 낙후된 기업이라기보다는 위험을 감수하고서까지 수출을 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없는 기업”이라면서 “기본적으로 매년 조달청에서 SW를 사가는 것은 물론이고 국내에서 오랜 기간 시장을 지켜온 관계로 큰 변동 없이 매출이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일갈했다.
◇“뼛속까지 현지화하라”…규모 대형화 시급=국내 SW업계 대부분은 일부 회사를 제외하고는 영어로 자사 제품을 소개하고 있는 홈페이지조차 없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인터넷으로 전 세계가 하나로 엮이는 현실에 한참 동떨어져 있다. 현지화를 위한 체계적인 시스템도 없다. 반면에 미국업체들은 설계 단계부터 외국어 버전으로 쉽게 변환할 수 있게 한다.
언어를 넘어 해당 국가의 경제 수준·문화적 상황을 철저히 파악하지 못해 좌충우돌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노키아가 저가 휴대폰으로 개발도상국 시장을 공략하듯, 수출 국가의 IT인프라 수준을 파악해야 한다. SW품질 요구 사항도 다르다. 대표적인 사례가 국내에서는 쉽게 무시되는 매뉴얼과 제품 UI의 불일치 문제다. 안철수연구소 관계자는 “국내에서는 제품 매뉴얼과 실구현 화면에 큰 차이가 없으면 넘어가는 사례가 비일비재한 반면에 일본에서는 다른 내용이 하나라도 발견되면 협상결렬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근본적으로는 국내 SW품질 수준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게 공통된 지적이다.
이와 함께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려면 출혈경쟁을 피할 수 있게 최소한의 규모는 갖춰야 한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현재 국내에는 연 매출액 100억원이 넘는 기업이 10여개에 불과하고, 1000억원이 넘는 기업은 티맥스소프트 한 곳에 불과하다. 실제로 마이크로소프트(MS), 오라클 같은 글로벌 SW기업은 자사의 핵심역량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인수합병을 거쳐 경쟁력을 높였다.
◇글로벌 스타 가능성 있다=역설적이게도 이 같은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그만큼 국내 SW업계가 발전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여전히 세계 시장에서 SW를 개발하고 수출할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전 세계적으로 모국어로 된 워드프로세서를 갖고 있는 곳은 MS를 제외하면 사실상 한국이 유일하다.
최종욱 마크애니 사장은 “SW는 사회적인 인프라를 기반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프로그래밍 기술만 갖추고 있다고 해서 개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며 “인도가 우리보다 훨씬 많은 SW전문 인력을 갖췄지만 워드프로세서 등 자체 개발 솔루션을 출시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일본은 SW소비 대국이지만 자체 SW가 없는 국가기도 하다. 업체난립으로 체질화된 출혈경쟁·수주경쟁은 한국 SW의 가격경쟁력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는 분석도 있다.
최 사장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지만, 글로벌 SW기업의 꿈은 결코 허황된 망상이 아니다”면서 “이제는 그간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거울삼아 앞으로 전진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정진욱기자, coolj@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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