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파란만장한 ‘인동초’ 정치 삶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중심으로 파란만장한 정치인생을 걸어오면서 ‘인동초(人冬草)’로 대비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대표적 인물이다.

김 전 대통령은 ‘지역색’과 ‘색깔론’을 악용한 정권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으면서 투옥과 연금, 망명 등의 고통을 겪었다.

또, 납치와 사형선고 등으로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는 등 우리 정치사를 통틀어서 가장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특히, ‘3김 시대’의 한 축을 이끌면서 정치계 대부로 역할을 해왔으며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 IMF 극복 등 값진 성과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정치 인생 마지막으로 달성하고 싶어했던 남북화해는 끝내 이뤄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김 전 대통령은 목포 앞바다 섬인 하의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님의 남다른 교육열에 힘입어 목포로 유학, 목포상고(현 전남제일고)에 수석 합격했다. 졸업 후 강제징집을 피해 일본인이 운영하던 해운회사에 취직했으며 해방 후 이 회사 관리인으로 사업수완을 발휘, 목포일보까지 경영하는 등 청년실업가로 성장했다.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가 좌익계열에 환멸을 느껴 탈퇴했으나 이 이력으로 평생 ‘색깔론’에 시달렸다. 반면, 김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 중 우익반동이란 이유로 공산당에 붙잡혀 투옥됐으나 총살 직전에 탈출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 1954년 실시된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목포로 출마했다가 낙마한 이후, 1956년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본격적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놨다. 1959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 1960년 5대 민의원 선거에서 잇달아 떨어졌지만 4·19 혁명으로 다시 치러진 1961년 5월 인제 보선에서 처음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으로 당선된 지 사흘 만에 의원직을 잃기도 했다.

1963년 6대 총선 때 목포로 지역구를 옮겨 당선되면서 정치 중앙 무대에 본격 진출한다.

1971년 첫 대선 출마로 시작된 김 전 대통령의 대권 도전은 36년간의 길고 긴 여정이었다. 첫 대선 출마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95만 표차로 석패했다.

이 후 박 정권으로부터 본격적으로 탄압을 받았으며 1972년 유신 선포 이후 1987년 6·29선언까지 총 17년간 납치, 망명, 투옥, 연금 등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었다.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후보 단일화에 실패, 평민당을 창당해 출마해 두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다. 그러나 노태우, 김영삼 후보에 이어 3위로 밀리는 아픔도 겪었다.

1992년 세번째 대선에 나섰으나 김영삼 후보에게 패해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 유학을 떠났다. 이후 1993년 귀국,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는 등 통일운동에 나섰으며 1995년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다시 정계로 돌아왔다.

대권 도전 4수만인 1997년 15대 대선에서 당선되면서 드디어 대권을 잡았다.

김대중 정권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IMF 외환위기로 시작된 DJ 정부는 외환위기 극복에 온 힘을 쏟았다. 5년 만에 외환위기에서 벗어나는 놀라운 성과를 일궈냈으며 6·15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면서 남북화해와 통일 기반 구축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정권 말기와 퇴임 후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각종 측근 비리 사건에 휘말렸으며 특정지역 인사편중 시비에 시달렸다. 북한군의 서해 도발로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도 많이 받았다. 퇴임 후에는 대북송금 특검 등으로 남북정상회담 성과에 타격을 받았으며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측근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이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영향력을 계속 과시하면서 ‘정치 9단’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2006년 10월 북한 핵실험 사태 당시 햇볕정책 책임론을 정면으로 반박했고 2007년 대선 전에는 여당의 대통합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현 정권에 대해서도 민주주의와 서민경제, 남북관계가 위기에 빠졌다고 비판하면서 민주개혁세력의 연대를 주문하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이명박 정부를 독재로 규정하는 등 대정부 투쟁의 선봉에서 한나라당과 보수 진영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서동규기자 dkse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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