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나도 집에 가려면 얼마 남지 않았어. 슬슬 준비해야지.” 한 은행 IT본부에 근무하는 부장의 푸념 섞인 말이다. 나이가 쉰 둘이 되면 임원으로 승진하든가 아니면 후선 업무로 배정을 받기 때문에 더 이상 IT조직에 있기 힘들다는 것이다. “임원이라고 해봐야 CIO 단 한 자리인데 그것도 요즘은 현업에서 오는 추세고, 그렇다고 후선 업무를 하기에는 좀 그렇고….” 이 부장은 말끝을 맺지 못했다.
이 부장은 20대 후반에 은행의 IT조직에 입사해 25년 가까이 은행 IT 업무를 경험했다. 기획에서 개발까지 IT관련 모든 업무를 수행한 베테랑이다. 중간 중간에 굵직한 대형 프로젝트에도 참여했고, 본인이 실제 프로젝트관리자(PM) 역할도 다양하게 경험했다. 그런만큼 누구보다도 은행 IT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거기까지만이다.
물론, 경험과 경력이 많다고 해서 이 부장과 같은 베테랑들 모두의 자리를 보존해 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조직의 변화를 위해 순환인사 등이 필요할 수도 있다. 위에서 너무 정체돼 있으면 그 또한 조직의 정체를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그 분야에서 정말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분야에서 전문가로 남게 해야 한다. 관리자가 아닌, 전문가로서 말이다. 즉, 장인(匠人)을 만들자는 것이다. IT조직의 장인.
성공한 기업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장인에 대한 얘기가 많다. 그러나 유독 기업 IT조직에서는 이런 장인 이야기를 듣기가 힘들다. 그만큼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오랜 기간 동안 열정을 쏟아붓는 IT인력이 없다는 소리다. 열정을 쏟아 부을 만한 IT인력을 만들지 못한 기업도 문제가 크다. 그리고 그만한 열정을 쏟아붓지 못하고 있는 IT인력 스스로에게도 문제가 있다.
유명 컨설팅 업체의 파트너급 컨설턴트는 은행 IT인력을 가리키며 “차장급 이상이 되면 그들은 은행원도 아니고 기술자도 아닌,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인력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처지가 돼 버린 것도 IT인력이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차장급 이상이 되면 IT 역량 강화보다는 생존하기 위해 어떤 정치력을 발휘해야 할까에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고 한다.
진정한 장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IT조직의 특수성을 고려, 별도의 승급이나 전문가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최고 전문가 자리에 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 대해서는 CIO에 버금가는 대우를 해줘야 한다. 이를 통해 IT조직의 장인이 생긴다면 수천억원을 들여 추진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비롯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많은 IT 운영상의 실수를 조금이라도 줄여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엄청난 손실을 막을 수 있는 길이다.
신혜권기자 hk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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