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무협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은 뛰어난 무공에도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변방의 인물로 묘사된다. 주인공은 내로라하는 무림고수들을 차례로 꺾으며 세력을 키우다 결국은 정통세력을 뒤엎고 최고수로 등극한다. 독자들은 정통세력에 홀로 맞서는 주인공의 비장한 모습에 응원을 보낸다. 요즘 중국에서 논란이 되는 산자이(山寨) 문화가 바로 이런 길을 걷고 있다. 중국산 짝퉁들이 오리지널을 밀어내고 강호의 패권을 잡는 날이 과연 올까.
산자이는 원래 산에 목책을 둘러친 터나 산적의 소굴을 말한다. 수호지의 108두령이 기거하는 양산박 산채가 바로 중국어로 산자이다. 본래 중국인에게 산자이란 정부의 관리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였다. 산적들이 모여 사는 소굴은 공권력이 통하지 않는 치외법권 지역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산자이는 소규모 지하공장이라는 또 다른 의미로 통용된다. 중국 동남부 해안을 따라 무수히 산재한 지하공장(산자이)들은 어떤 물건이든 신속하게 모방해 값싸게 해적판을 만드는 능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생산 네트워크다.
2001년 광저우와 중국 최대 경제특구인 선전을 중심으로 ‘Samsang’ ‘NOKLA’ 브랜드의 짝퉁 휴대폰이 대량으로 유통됐다. 1세대 짝퉁 휴대폰은 세계적 브랜드 제품과 외양은 비슷하지만 품질은 조악했다. 그러나 가격이 엄청나게 쌌기 때문에 나름대로 인기를 끌었다. 이때만 해도 중국산 짝퉁폰을 심각하게 우려하는 시각은 없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짝퉁 휴대폰은 점차 산자이로 변신한다. 유명 브랜드 제품을 모방하는 단계를 넘어 정작 정품에는 없는 새로운 기능을 집어넣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산자이가 중국업체들이 창조적 모방을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때맞춰 2007년 10월 중국정부가 휴대폰 생산 면허제도를 폐지하면서 우후죽순 휴대폰 제조업체들이 생겨났다. 산자이 휴대폰의 득세는 더욱 심해졌다. 애플의 진짜 아이폰에 기능이 더 붙으면서도 가격은 한참 아래인 ‘마이폰’ ‘하이폰’ 등이 이때 태어났다.
중국산 짝퉁폰은 겉모양은 똑같지만 정작 중요한 기능은 하나도 없어 경멸받는 사례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것도 많다. 삼성전자에서 산자이 휴대폰의 경쟁력에 놀라 관련 중국회사를 찾아내 주문자생산방식(OEM) 거래를 제안했을 정도다. 완제품 이상 가는 산자이도 있다는 뜻이다. 기술력을 인정받은 산자이 제품은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동남아 등지에 수출되기도 한다. 산자이 휴대폰이 나온 이후 디지털카메라, MP3P, 노트북, TV, 자동차 등 모든 분야에서 산자이 제품이 쏟아지고 있다.
중국 최대 검색사이트인 바이두(百度)와 구글, 야후를 합성한 산자이 검색사이트가 등장했다. 이제는 사람도 산자이가 등장한다. 중화권의 유명스타인 저우제룬과 비슷한 인물을 내세운 산자이 광고가 유행하면서 산자이 스타라는 말도 유행하고 있다. 국제 자동차 전시회에서 오리지널 부스 옆에서 대놓고 짝퉁차량을 출품하는 뻔뻔함도 도를 넘고 있다. 우리나라의 마티즈 자동차를 베끼는 건 애교였고 영국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그대로 흉내낸 지리 자동차의 GE 모델은 진품의 6분의 1 가격에 팔리고 있다.
중국인은 산자이를 보면서 주류 문화나 권위를 거부하는 반항심리, 썩어빠진 송나라 조정에 항거해 산채에 들어간 양산박 호걸들의 이미지를 느끼는 것 같다.
◇대중적 지지가 짝퉁과의 차이=중국의 산자이와 우리나라의 짝퉁은 무엇이 다를까. 우리나라에서 불법복제는 경멸의 대상이지만 중국에서 산자이 제품은 상상력과 아이디어, 저렴한 가격 등 긍정적 이미지로 포장돼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이다. 산자이가 제조업계 전반으로 확대되더니 이제는 TV드라마, 영화, 출판 등 문화계 전반으로 확산되는 추세가 이를 방증한다. 중국의 네티즌 여론조사에서 과반수는 산자이가 장려할 트렌드라고 답했고 비판적 태도는 소수에 불과했다.
산자이가 심정적 지지를 받는 원인 중 하나로 전문가들은 중국의 심각한 빈부격차를 꼽는다. 개혁개방 정책으로 일부 계층은 큰 경제적 풍요를 누리지만 대다수 서민은 소득이 낮아 도저히 진품을 살 형편이 못 된다. 산자이는 구매력이 약한 서민들도 쉽게 쇼핑의 만족감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중국정부가 사회안전을 위해 산자이 제품의 범람을 묵인하며 은근히 권장한다는 분석도 있다. 지난 2월 중국 선전시 정부는 인민대표대회에 산자이 제품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방안을 업무보고에 포함시켰다. 짝퉁에서 태어나 선천적으로 브랜드 가치가 낮은 산자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려는 전략이다. 일부 지식인은 산자이가 중국의 문화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이란 해석도 내린다. 중국문화는 한나라 이후 지속적으로 다른 민족의 문화를 흡수하고 베끼면서 중국식 문화로 재창조하는 프로세스를 밟아왔다. 결국 산자이도 중국대중이 외국문물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비주류 문화라는 해석이다.
◇기본은 해적질=그렇다고 중국정부가 산자이 문화를 마냥 방치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고 있다. 산자이는 기본적으로 다른 기업, 다른 개발자의 노력을 아무런 대가 없이 밟고 올라서는 해적 경제에 기초한다. 직접적으로는 한국을 포함해서 카피대상이 되는 외국기업이 피해를 본다. 최근 관세청자료에 따르면 삼성전자 애니콜은 도용 비율이 중국 전체 시장의 10∼12%(650만대)로 추정되고, LG전자의 TV와 휴대폰 등의 도용사례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자동차 부품도 중국에서 제조한 산자이 제품으로 피해가 커진다고 보고 전국 세관에서 통관심사를 강화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정부가 산자이를 통제하지 못하면 자국경제에 오히려 큰 피해를 미칠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뻔뻔하게 베끼면서 크는 전략은 초기엔 기업이나 산업발전에 잠시 도움이 되지만 지식재산권을 인정하지 않는 후진성은 결국 자신들의 창의성도 잡아먹는다. 산자이 기업들이 ‘짝퉁’의 한계를 딛고 기업혁신과 제품 업그레이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제일 큰 걸림돌은 주변의 산자이 제품들이다.
요즘엔 중국 지식층이나 당고위 인사들도 “산자이는 원칙적으로 표절, 위조, 가짜기에 나라의 수치며 강력히 단속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돌아서고 있다. 결국 산자이는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서민들에게 친근한 모습의 반대편에는 남의 것을 훔치고도 오히려 뻔뻔한 얼굴이 있다. 이 모습 역시 양산박 두령들과 닮았다. 민중의 시각에서 보면 호방한 영웅호걸들이지만 정부 시각에서 보면 살인과 강도짓도 서슴지 않는 흉악범들이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중국 문화의 미래가 있을지는 중국인 스스로 잘 알고 있을 터다.
◇산자이의 현재
산자이 문화는 많은 논란에도 당분간 생명력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동안 중국정부가 해적판 단속에서 적극적 의지를 보인 사례가 드물었고 중국사회에 만연한 빈부격차 때문에 산자이를 선호하는 서민층의 수요도 쉽게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의 사회적 불균형이 심화될수록 서민들의 욕망을 풀어줄 언더 문화는 더욱 번성하게 마련이다. 현재 산자이 문화는 휴대폰, 넷북과 같은 해적상품에서 TV프로그램, 영화 같은 문화상품의 패러디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기업의 시각에서 산자이로 포장된 중국산 짝퉁과 싸움은 꽤 오래 지속될 것이란 신호다.
산자이에 관한 중국 내부의 찬반 의견은 여전히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찬성자들은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혁신을 하는 중국식 풀뿌리 문화란 주장을 굽히지 않고 반대자들은 산자이가 도적질이며 중국문화의 혁신성을 방해하는 암적요소라고 주장한다. 산자이에 대응하는 한국의 전략은 어떠해야 할까. 산자이가 중국특유의 문화적 현상이 아니라 짝퉁, 불법카피란 사실을 지속적으로 알려야 한다.
온기홍 베이징대 언론학 박사과정은 “어느 나라나 짝퉁문화는 있는데 산자이 현상은 중국언론들이 선정적으로 부추긴 측면도 크다”면서 “한국인도 산자이란 개념 자체를 용인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가장 강성했던 당나라 시대에는 주변 문화를 수용하는 포용성이 높았다. 반면에 중화주의에 빠져 주변 문화에 배타적인 시기는 국력이 쇠퇴했다. 산자이는 중국이 대외개방으로 외국 문물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일종의 병리적 현상이다. 중국인은 비약적 경제성장에 힘입어 새로운 성당시대, 미국과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양강 G2 구도를 꿈꾼다면 도적들의 산채를 버리고 큰 성으로 들어와야 한다.
배일한·최순욱기자 bailh@et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