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관심을 모으고 있는 상호공급기획예측프로그램(CPFR, Collaborative Planning Forecasting and Replenishment)은 제조업체와 유통업체가 공급망관리(SCM) 분야에서 공통으로 고민하는 핵심 화두 중 하나다. CPFR는 제조업체와 유통업체가 생산·수요계획을 상호 공유함으로써 시장 환경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기법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 등지에서는 주요 제조업체와 유통업체를 중심으로 CPFR가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반면 국내에서는 주요 기업을 중심으로 다양한 시범 사업을 진행해 왔지만 여전히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다. CPFR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는 확산되고 있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확산의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도 삼성전자 등 주요 기업들은 해외 주요 유통업체와 CPFR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해외 협력사와는 가능한데 왜 국내에서는 제대로 확산하지 못하는지, 이런 문제들을 극복할 방안은 무엇인지 알아본다.
CPFR는 말 그대로, 제조업체와 유통업체가 예측, 계획, 상품보충 프로세스를 공동으로 운영하는 SCM 기법을 의미한다. 서로 판매 및 재고데이터를 공유함으로써 소비자 수요 예측과 주문관리를 고도화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제조업체는 합리적인 생산 계획을 수립할 수 있고, 유통업체는 각종 프로모션을 수행할 때 원활하게 제품을 조달받을 수 있다.
CPFR는 미국 상거래표준협회(VICS)가 제정한 표준이 시초가 돼 월마트에서 처음 상용화했다. 해외 생산 공장으로부터 물품을 조달받을 경우 1∼2개월의 배송 시간으로 인해 결품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이 기법을 도입한 것이다. 이후 미국의 주요 유통 기업 및 제조 기업들을 중심으로 CPFR는 급속히 확산됐다. 삼성전자의 독일 법인과 보다폰은 대표적 우수사례로 지목된다. 현재 미국 베스트바이의 경우 거래하는 모든 제조업체들과 CPFR을 시행하고 있다. 이를 위한 별도의 포털 사이트를 마련, 이 포털이 독립된 하나의 법인으로 성장했을 정도다.
#국내 필요성은 ‘공감’ … 그러나 수 년째 ‘제자리’
최근과 같은 경기 불황은 CPFR의 필요성을 더욱 커지게 만들었다. 창고에 있는 재고가 치명적인 손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조 업체들은 유통 업체의 주문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매장의 실시간 판매 현황에 근거해 합리적인 생산 계획을 세우고 싶어한다. 특히 SCM이 고도화 될수록 정확한 수요예측을 위해서는 매장 판매시점관리(POS) 정보의 확보가 더욱 필요해졌다. CPFR를 도입하면, 제조 업체는 유통 업체와 각종 정보를 공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요계획’에 함께 참여할 수 있다. 유통 업체의 창고에 자사의 물건이 얼마나 쌓여있는지 모른 채 공장에서 재고를 양산하는 악순환을 더 이상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불황기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기 위한 가격 할인 경쟁 및 프로모션이 잦을 수밖에 없는 유통 업체로서도 판매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원활하게 물품을 조달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필요성 증가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CPFR는 여전히 제자리 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개념은 일부 적용되고 있으나 해외처럼 시스템 연결을 통해 POS 정보까지 공유하는 사례는 드물다. 현재 국내에서는 삼성전자만이 이마트, 하이마트와 손잡고 CPFR를 시행하는 정도다. 3년전부터 유한킴벌리, P&G 등 생활용품 업체들이 CPFR 도입을 위해 삼성테스코, 롯데마트 등과 CPFR 시범 사업을 해오고 있지만 여전히 시범 사업에 머물러 있다. 우리보다 한 발 늦게 시범 사업을 시작한 중국의 월마트는 지난해 본격적으로 CPFR을 시작해 상용화에서 우리를 앞질렀다.
# 왜 확산 더디나?
◇국내 유통환경 한계=삼성전자와 LG전자는 해외에서의 CPFR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에서도 이를 확산하려고 고심중이다. 그러나 CPFR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POS 정보, 즉 판매 데이터를 공유해야 한다. 문제는 국내 유통 업체들이 반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사 고유의 영업 정보를 노출하는 데 대한 부담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가전 시장의 경우 아주 심각하다. 해외와 달리 국내에서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제조사인 동시에 ‘디지털프라자’와 ‘베스트샵’ 이라는 각각의 유통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많은 경우 한 지역에서 협력사이기도 한 다른 유통 업체들과 경쟁 구도에 놓여 있다. 유통 업체로서는 이들을 ‘제조사’로만 간주하고 판촉 계획이나 POS 정보를 맘놓고 공유하기는 힘들다는 게 속내다. 그나마 앞서간다는 삼성전자와 하이마트의 CPFR도 지점별 POS 정보가 아닌 전체 POS 정보를 공유하는 데 그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생활용품 업계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휴지, 기저귀 등 필수용품의 경우 특정 유통 업체가 지나친 가격 인하를 단행할 경우 다른 유통업체와 해당 제조업체간 CPFR 협약이 깨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CPFR 도입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제조 업체와 유통 업체 담당자들간 암묵적 거래가 상존해 온 것도 걸림돌이다. ‘밀어내기’라고 불리는 제조 업체의 연말 할인 판매를 통해 제조 업체 영업 담당자들은 실적을 높일 수 있고, 유통 업체 구매 담당자들은 낮은 가격에 제품을 대량으로 매입할 수 있다.
유통 업계의 한 전문가는 “연말에 할인된 가격으로 대량의 물품을 입도선매해 창고에 쌓아두는 게 유통 업체들의 관행”이라며 “정상적인 가격으로 제품을 구매해야 하는 상황이 오히려 유통 업체로서는 큰 부담이 된다”고 말했다. 유통업체들이 CPFR에 대해 소극적인 또다른 이유다. 실제 삼성전자의 경우 국내 유통 업체와 CPFR를 시행하면서 연말 ‘사재기’ 관행을 일부 해소할 수 있었다고 한다.
◇SCM과 IT 수준 불균형=CPFR는 기본적으로 상호 합의와 약속에 의한 공급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합의를 이행할 수 있는 능력, 즉 제조 업체가 공급 계획을 수립하고 제 때 납기일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유통 업체가 판매 정보에 대한 정보 가시성을 제공하면, 제조 업체 또한 ‘공급’에 대한 가시성을 보장해줘야 한다. 업계 한 전문가는 “사실 국내 제조 및 유통 업계에서 일부 기업을 제외하고는 SCM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경우가 태반”이라며 “기업들의 SCM 역량 또한 구매, 수요 등 각기 다른 영역에 치우쳐 있다 보니 기업간 SCM 전체 프로세스를 연계해야 하는 CPFR 이행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고도화된 SCM 프로세스를 갖춘 기업들간에는 CPFR를 시행할 때 ‘벌금제’가 적용되기도 한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쪽이 벌금을 무는 것이다. CPFR을 통해 협력할 경우 통상 일주일에 한 번씩 데이터를 공유하기 때문에 판매 및 생산 데이터가 일주일에 한번 취합될 수 있는 IT 인프라도 갖춰야 한다. 국내 유통 기업 중에서는 삼성테스코와 롯데마트가 CPFR 프로세스 정립과 관련 시스템 검토 등을 통해 제조업체와의 상생을 위한 협업체계 확대 노력을 진행하고 있다.
◇유통 구조 개선 시급=CPFR의 적용과 확대를 위해서는 관행화된 유통 구조의 문제점들을 개선해야 한다. 우선 ‘정보 보안’에 대한 폐쇄적인 생각을 깨고, 상호간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관건이다. 아직 국내에서는 성공적인 CPFR 사례가 드물기 때문에 뿌리깊은 ‘불신’이 제거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제조 업체와 유통 업체가 상생하기 위해서는 투명한 유통 질서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확산하고, 이에 걸맞게 공급·유통 문화를 개선해 나가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중장기적 변화 의지를 전제로 한 과감한 ‘열린 혁명(Open Innovation)’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 인력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아직 국내에는 CPFR 관련 전문가가 많지 않아 SCM 담당자 혹은 타 업무 담당자가 임시로 CPFR 업무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은 만큼 CPFR 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한 노력도 정부와 업계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유효정기자, hjyou@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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