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기술과 전통산업이 만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3D 컨버전스(융합) 현상이 주목을 받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첨단 3D 기술을 주인공이 튀어나올 듯한 3D 영화나 입체 TV처럼 신기한 볼거리로만 간주하곤 한다. 실제로 산업현장에서 3D 기술은 구태의연한 비즈니스 모델을 혁신하고 전통문화를 보존하며 친환경 국토개발을 돕는 등 놀라운 역할을 해내고 있다. 평평한 2차원이 아니라 입체적인 3차원 시각으로 세상을 살펴보면 새로운 시장수요와 혁신의 길이 보인다.
인류는 그동안 사물의 정보를 주로 2차원 형태(문서)로 만들어 처리했고 3차원 데이터의 취득 및 가공은 사람의 눈대중과 손끝에 의존했다. 전통산업에서 3차원 데이터를 직관적으로 다루는 사람을 가리켜 기술자라고 불렀다. 3D 융합이란 이처럼 아날로그로 처리하던 3차원 데이터를 디지털 방식으로 바꿔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혁신을 지칭한다. 3D 융합을 추진하려면 모든 사물 및 공간의 3차원 데이터를 취득한 후 다양한 형태로 가공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과정까지 다양한 요소기술이 필요하다. 숙련된 기술자의 손놀림을 3차원 디지털 정보로 전환해켜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대표적 사례가 귀금속 산업이다.
◇귀금속과 3D 융합
2009년 우리나라 귀금속 산업은 금값 상승과 국내외 보석시장의 급속한 침체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세계시장의 50%를 차지하는 미국의 귀금속 시장이 경기침체로 직격탄을 맞았다. 과거 한국 보석세공사의 뛰어난 손재주는 세계적으로 알아줬지만 인건비가 싼 중국에 제작기반도 빼앗겨 국내 귀금속산업은 2004년 이후 계속 감소하고 있다. 이제 한국은 부가가치가 높은 고급 디자인을 바탕으로 한 브랜드화가 귀금속산업을 살려낼 유일한 길이다. 3D 융합은 귀금속 업계의 암울한 상황에 한 줄기 빛을 비추고 있다.
종로 금은방 거리에는 요즘 3D 쾌속조형기를 이용, 고난도의 귀금속 장신구 주물제작을 불과 몇 시간 만에 해내는 첨단 생산기법이 인기를 끌고 있다. 쾌속조형(rapid prototyping) 전문업체 SNC코리아는 보석 디자이너가 3차원 캐드로 설계한 귀금속 디자인을 전송받는 대로 부지런히 본을 떠준다. 이를 다시 주물로 만들고 금은을 녹여 부어서 실제로 귀금속 제품으로 나올 때까지 이틀이면 충분하다. 그동안 거미줄, 벌집 모양의 장신구 본을 만들려면 오랜 경력의 세공기술자도 일주일에서 보름씩 걸렸지만 독일에서 들여온 최신 3차원 가공기는 7∼8시간 만에 아무리 복잡한 디자인도 플라스틱 수지로 뚝딱 만들어낸다. 3D 조형기의 가공 정밀도는 16㎛ 이하로 사람이 깎을 때보다 훨씬 정밀하고 원형 디자인에 가깝다. 보석세공사 10명이 밤새워 할 일을 3D 가공기 한 대가 해내니 중국산 귀금속보다 가격경쟁력과 디자인 적용속도에서 앞선다. 현재 국내에서 생산되는 귀금속 중 약 10%가 3D 가공을 거친다. 전문가들은 일부 대형 귀금속 제조사가 생산과정에만 적용한 3D 기술을 디자인과 귀금속 유통 전반으로 확대하면 한국 귀금속 산업이 르네상스를 맞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금은방에 수백점의 귀금속이 전시된 유리 진열대를 치우고 3D 입체 모니터를 설치한다. 모니터에는 실제와 똑같은 귀금속 디자인의 3D 영상을 고른다.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없으면 3D 캐드로 고객 취향에 맞춰 보석 종류나 디자인 형태의 수만가지 조합을 창조할 수 있다. 큰 부자가 아니라 평범한 회사원이나 학생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보석 디자인 ‘UCJ(User Created Jewerly)’ 샘플을 주문해서 누군가에게 선물할 수 있다. 금은방 주인 쪽에서는 부담스러운 보석 재고를 떠안지 않고도 고객 취향에 100% 맞는 보석을 팔 수 있으니 여러 모로 이득이다. 국내에서 만든 귀금속 디자인을 해외 3D 생산센터(RP Casting)로 전송하면 현지에서 똑같은 제품들이 쏟아지니 원가절감과 맞춤형 디자인에 크게 유리하다. 김양웅 광운대 연구원은 “귀금속 시장의 전 과정에 3D 기술을 적용한 사례는 미국, 이탈리아 등 보석 선진국에서도 아직 없다. IT산업이 발달한 한국이 귀금속산업의 3D융합을 주도하면 21세기 귀금속 패션 시장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건축, 토목과 3D융합
지난해 숭례문 전소사건은 국민에게 큰 충격과 실망을 안겨주었다. 3D 기술은 한창 진행 중인 숭례문 복구작업에도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3D 전문업체 위프코는 화재 이전인 2002년도에 숭례문 내외부 모두를 3D 스캔해서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당시 투입된 3D 스캐너의 정밀도는 50m 거리에서 불과 5㎜로 디지털 공간에서 화재 이전의 숭례문 외형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 과거 수작업으로 실측한 2D 숭례문 복원자료도 있지만 3D 스캔으로 측량한 디지털 자료와 비교할 때 오차범위가 최대 30㎝까지 벌어져서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나중에 복원된 숭례문의 지붕선이 과거와는 다르다는 지적이 나올 수도 있는 대목이다. 게다가 숭례문은 화재로 인해서 남은 누각은 물론이고 기단을 받치는 석재도 일부 변형됐을 가능성이 있다. 김호룡 위프코 대표는 숭례문을 최대한 원형에 가깝도록 복원하려면 가장 객관적인 3D스캔 자료를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건축 분야에서 3D 스캔 기술이 도입된 역사는 10년에 불과한데 최근 수요처가 급격히 늘고 있다. 옛 동대문운동장에 다음달 착공할 디자인 파크 건물도 모든 감리과정에 레이저 3D 스캔이 표준규격으로 채택됐다. 미국은 정부 소유의 모든 건물을 3D 스캔해서 안전진단과 보수 및 효율적인 자산관리에 활용하고 있다. 유려한 곡선을 자랑하는 초고층 건축물의 감리에도 필수적으로 쓴다. 건물의 측량정보를 스캔해서 실제 설계도와 비교하면 제대로 건물을 지었는지 금방 드러난다. 영국 글래스고시는 도심 전체를 3D 스캔해서 가상공간에 완벽한 VR도시를 구축함으로써 인터넷 환경에서 누구나 접근해서 도시 재개발·디자인·방재·소방·문화재 등 다방면의 사용자가 활용하도록 지원한다. 국내에서도 석굴암·한국은행·명동성당과 같은 역사적 보존가치가 큰 건물은 3D 스캔 작업을 해두는 것이 관례로 굳어지고 있다. 서울시가 성냥갑 빌딩은 짓지 않겠다는 지침에 따라서 유려한 곡선을 자랑하는 비선형 건축물의 3D 융합은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실내 공간의 3D 융합은 거주자의 편의성을 높이는 데도 중요하다. 삼성전자는 아파트 형태를 지정하면 어떤 가구나 가전제품의 적절한 배치를 알려주는 3D 공간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도로시설물, 교량, 댐 등 토목 분야에서도 3D 융합은 효과적인 시뮬레이션 기법과 연계해서 공기단축과 환경보호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호남 고속철도 공사는 3차원 공간에 시간요소까지 더한 4차원 개념으로 공정관리 효율을 극대화하고 있다. 박동주 지오시스템 전무는 첨단 3D 기술 덕분에 고속철 승객이 보는 경관까지 고려해서 철도구간을 설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역사 콘텐츠와 3D융합
3D 기술은 이미 사라져 버린 역사도 되살리는 괴력을 갖고 있다. 3D 가상공간에서 지금은 사라졌거나 훼손된 인류의 문화유산을 고증자료와 상상력을 발휘해서 재현한다. 웹사이트에 접속만 하면 마치 세컨드 라이프처럼 조선, 고려, 삼국시대로 돌아갈 수 있다.
호남대 가상현실응용 지역혁신센터는 디지털 문화유산 복원에 대한 연구는 가상공간 플랫폼을 통한 문화유산 접근 방식으로 전통과 역사에 대한 흥미로운 접근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고산 윤선도의 생가를 3D 가상공간에서 꾸며서 방문자들의 역사적 이해를 돕는다. 단지 문화재를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서 상상력을 덧붙여서 새로운 역사콘텐츠로 만드는 것이다. 호남대 정영기 교수는 3D 융합에 증강현실, 햅틱기술을 접목해 백제 수도를 걷거나 만지는 등의 오감으로 느끼는 디지털 문화공간을 구상하고 있다. 앞으로는 박물관에 들어가서 유물만 보는 것이 아니라 체험형 가상현실 시스템에 들어가 몸을 움직이면 벽과 바닥에 설치된 스크린 영상이 따라서 움직인다.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일부만 남은 문화재를 증강현실기술로 전체를 복원하는 과정도 실감나게 펼쳐진다. 정영기 교수는 “3D 융합은 과거의 살았던 사람의 삶을 현실세계로 연결해주는 가교”라면서 3D 기반 역사 콘텐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처럼 3D 기술은 입체 영화와 같은 신기한 볼거리를 넘어서 패션산업과 건축, 토목, 역사유적까지 전통산업 곳곳에서 융합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3D 융합이란 디지털 혁명이 2차원 데이터를 넘어 3차원 입체공간으로 전이되는 필연적인 과정이다. 3D 융합의 거대한 트렌드를 경제성장에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면 업종을 가리지 않고 3D 전 분야를 아우르는 입체적 정책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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