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야든 최초는 중요하다. 특히, 시장 경제에서 최초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제품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고 소비자로 하여금 그 서비스를 사용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이 세계 1위 국가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것도 최초 개발, 최초 진출 등과 같은 처음이라는 수식어를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 선점의 효과는 유형 제품보다는 소프트웨어(SW) 등 무형의 서비스 산업에서 더욱 강하다. 학습 효과, 인지 효과 등 소비와 관련된 모든 이론은 무형 서비스 산업에서 학습화된다.
SW 산업에서도 ‘최초’라는 지위는 아주 공고하다. 차기 솔루션이나 제품이 웬만큼 좋지 않으면 처음 나온 SW를 누르지 못한다. 이전 제품을 몰라도 다음 버전을 사용할 수 있는 ‘불연속적 서비스’가 주를 이루는 SW 산업에서 최초 개발은 회사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최초로 성공한 업체들=최초 개발이라는 이점으로 이른바 ‘영생’의 지위를 얻은 기업은 아주 많다. 물론 최초 개발이 업체 생존력을 보장해주지 못했던 예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대부분 해당 서비스가 시장에 요구를 반영하지 못한 사례다. 아니면 그 기업이 제품의 홍보를 게을리해서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대표적이다. 윈도, 오피스 등 컴퓨터 사용에 필수적인 SW를 시장에 공급하고 있는 이 회사의 시장 점유율은 80% 이상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MS를 기술력 1위 업체로 부르진 않는다. 물론 MS의 기술이 우수하긴 하지만 시장을 먼저 차지하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지위기 때문이다. 최근 구글 등의 위협을 받고 있긴 하지만 당분간은 1위 자리가 변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 외에도 세계 최초를 이용해 시장을 지키고 점유율을 확대시키고 있는 기업은 수없이 많다. 어도비도 그렇다. 올해로 창립 25주년이 된 이 회사는 PDF라는 온라인 문서 포맷을 개발해 인류의 문서 유통 시스템을 바꿔 놓은 기업으로 불린다.
1982년 데스크톱 화면에 나타난 서식·그래픽·글꼴 등을 그대로 종이에 인쇄할 수 있는 포스트스크립트 기술을 선보이며 출발한 어도비는 이후 포토숍과 애크러뱃, PDF 등을 출시해 업계에 커다란 변혁을 일으켰다. 이후 많은 회사가 PDF와 유사한 SW를 내놨지만 기능과는 별도로 표준 경쟁에서 어도비를 넘어서지 못했다.
◇한국에도 최초가 있다=최초의 유의미성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최초 개발로 기업의 틀을 잡은 업체가 한국에도 존재한다. 잉카인터넷(대표 주영흠)은 지난 2000년 1월 PC 보안 SW 개발회사로 출발, 2006년 115억원의 매출을 올려 처음으로 100억클럽에 이름을 올렸다.
이런 성장세는 핵심기술을 발 빠르게 선점하는 속도전에 능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세계 최초로 클라이언트 PC 시스템용 정보보안 서비스를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신개념 ASP 보안서비스 ‘엔프로텍트 네티즌’을 출시해 전 세계에 특허 등록했다.
알서포트(대표 서형수)는 세계 최초로 원격지원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웹과 아이콘만으로 고객을 지원할 수 있는 SW를 개발했다. 기술의 진보성을 인정받아 우리나라에서 특허를 획득했고, 미국과 일본 등 세계 시장에서 지식재산권으로 보호받고 있다.
제품 상용화 이후에도 꾸준한 기술개발과 고객지원에 노력해 현재 원격제어 솔루션 시장의 점유율 1위를 확보했다. 미국과 일본 굴지의 기업들이 알서포트의 원격지원시스템을 이용해 민원과 고객지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에서 벌어들이는 수익도 연간 20억원이 넘는다.
게임 분야에서는 세계 최초 기술개발로 시장을 장악한 사례가 수없이 많다. 이와 관련해 엔씨소프트의 리니지가 첫 순위로 꼽힌다. 모두가 비디오게임을 개발할 때 온라인게임 개발에 전력한 덕이다. 이 밖에 솔트룩스는 유럽 최대의 펀드 프로젝트인 FP6, FP7에 아시아 유일의 기업으로 참여하고 있는 등 검색 솔루션 산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최근엔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서치 어플라이언스 제품 ‘인투 서치박스’를 일본 현지 개발하는 등 활발한 국제 활동을 통해 글로벌 스타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초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자=최초라는 단어가 반드시 원천기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객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파하고 이를 충족하는 모델을 만들면 시장은 곧 ‘내 것’이 된다.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를 갖고 글로벌 기업 대열에 오른 SW 기업들은 대부분 비즈니스 모델을 처음으로 만든 기업이다. 가상화 시장을 연 VM웨어는 가상화 기술에 대해 지금도 IBM에 일정 수준의 로열티를 내고 있지만, 최초로 모델을 만들었다는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다.
김창균 아이지시스템 사장은 “몇 안 되는 원천기술에 집착하기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애플리케이션 개발로 국내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승부를 걸 수 있다”며 “애플리케이션 즉, 비즈니스 모델은 원천기술과 달리 분야가 넓어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임창무 한국오라클 팀장은 “고객들은 보안 솔루션을 도입했을 때 얼마나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지 수치화할 수 있기를 원하는데 이를 증명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면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며 “고객이 원하는 모델을 처음 만들어내는 기업이 승자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최초와 함께 요구되는 것은 최강 능력이다. 최초로 개발했더라도 시장의 경쟁을 견딜 만한 능력이 있지 않으면 버텨내기 힘들다. 넷스케이프 등 제품을 먼저 시장에 내놨지만 경쟁에서 밀린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최강 능력은 시장이 인정할 때만 의미가 있다.
물론 경쟁자를 물리칠 강력한 능력의 보유는 업체가 해야 할 일지만 이와중에 정부의 지원도 필요하다. 이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데는 정부의 힘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IT 융합 비즈니스는 정부의 후방 지원 없이는 발전하기 힘든 산업이다.
산업을 위한 토대 마련을 위해선 범정부 간 협업이 우선이다. 산발된 지원으론 분산적인 정책밖에 만들어내지 못한다. 지난해 말부터 지식경제부와 한국SW진흥원 등은 SW 서비스 비즈니스 모델 활성화 방안을 마련, 세계 최초 개발을 유도하고 있어 긍정적이다. 그러나 약간의 아쉬운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개발을 위한 보다 실질적인 지원은 여전히 미흡한 수준이다.
그렇다면 실질적인 지원을 위해선 어떤 정책이 필요한가. 이명박 대통령이 말한 ‘닌텐도’를 개발하기 위해선 특정 영역을 집중 지원하는 ‘핀 포인트’ 정책이 필요하다. 특히, 세계 최초 SW를 개발하기 위해선 선언적인 수준이 아닌 보다 실질적인 차원에서 지원책이 집중돼야 한다. 이와 관련, ETRI의 예를 볼 필요가 있다.
ETRI는 음성인식 내비게이션 SW 등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를 단 기술이 수없이 많지만 대부분 상용화 단계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사장되고 있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순 없다. 보다 강력한 비즈니스 마인드가 요구되는 이유다. 정부는 세계화 가능성에 많은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최강 능력을 가졌다 해도 국내에만 서비스가 한정된다면 영속적인 제품의 생존은 보장할 수 없다.
이와 관련, 뜨는 비즈니스의 지원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최초 SW 개발로 시장을 장악할 기회가 어느 분야보다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RFID 시장은 지난해 1560억원으로 전년 대비 60% 이상 성장했다. USN 시장 또한 지난해 1680억원에서 오는 2012년에는 1조1600억원의 급성장이 예상된다. 이 분야와 관련한 표준 SW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다.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다.
한정훈기자 existe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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