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한시적이다. 위기 이후 세계의 질서, 한국 위상이 어떻게 될지 염두에 두고 준비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10일 원로들과의 오찬에서 강조한 위기론이다. 위기 속에서 새 시장을 개척하고 남들이 다 어려울 때 전력을 다해 새 기술을 개발하면 결과적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새해가 밝았다. 기축년을 알리는 붉은 해가 솟아올랐지만 경기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금융 위기가 실물 경제로 옮겨 붙고, 서민들의 생활고가 현실화하는 상황이 계속될 것이란 전망이다. 기업들의 상황도 그리 녹록지 않다. 한국은행이 2009년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을 2%로 IMF 이후 최악을 예상했다.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이란 우려도 곳곳에서 제기됐다. 11년 전 IMF 구제 금융 위기 상황이 다시 도래했다는 전망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이는 수출과 내수에서 국내 경제를 이끌어온 IT산업에 치명타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기업이 주눅 든 채 웅크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위기는 기회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휴대폰과 반도체 시장의 경쟁력을 더욱 강화해 경쟁 기업과 격차를 더 벌리겠다고 ‘선전포고’했다. LG전자도 글로벌 시장에서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통합 글로벌 광고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위기일수록 공격적인 브랜드 투자를 하겠다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재무 유연성과 소프트 경쟁력이 양호한 기업이라면 M&A와 선행투자를 통해 불황기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며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국내 대표기업은 글로벌 경쟁 기업에 전혀 뒤처지지 않아 공격 경영을 펼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IT 저력에 한국 경제 달렸다=우리 경제의 희망은 IT에 달렸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지난해 우리는 연간 4000억달러의 물량을 해외에 수출했다. 이 가운데 IT는 1300억달러를 넘게 수출하며 우리나라 전체 수출 비중의 31%를 차지해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건설, 자동차, 기계류의 수출을 합친 것보다 많다.
그야말로 IT가 무너지면 우리나라 수출이 무너지고 우리 경제가 휘청이는 이유다. 특히 1997년 12월 국내 경제가 IMF 구제금융위기로 고통받고 있을 때 IT 산업은 99년과 2000년 각각 39.3%와 31.1%의 고성장을 구가하며 한국 경제호에 희망을 실어줬다. IT 벤처기업도 2000년 당시 48억달러를 수출하며 전년 대비 42.8%의 경이적인 수출 성장률로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 지난해에도 벤처기업은 100억달러가 넘는 수출을 기록했다. 이는 2000년 대비 두 배에 달하는 성장이다.
고부가가치의 일자리 창출에도 IT 산업은 가장 앞서 있다. 354만명의 제조업체 종사자 중 반도체, 전자, IT 서비스, 연구개발 종사자는 100만명을 웃돈다. 또 새해에 필요한 기술인력 수요의 대부분은 정보처리(28.61%)와 전자산업(13.22%)으로 가장 높다.
◇준비하는 기업에 위기는 기회다=국내 산업의 버팀목인 IT 산업이 현재에 안주해선 우리나라의 미래도 없다. 지난해 반도체, 휴대폰, PC, 디스플레이의 수출 성장률이 정체한 것은 IT 산업의 위기를 대변한다. 또 새해엔 북미 시장의 수요둔화가 본격화되고 수출 대상국가인 EU와 중국, 중남미 등도 어려운 경제가 예상돼 수출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위기는 기회라고 말한다. 실제로 2000년 초 IT 버블시기 전후 미국 기업의 상위 25%에 속했던 기업 중 기존 위치를 지킨 기업은 60%에 불과했다. 또 하위 75%에 속하던 기업 중 14%가 상위그룹에 편입됐다.
이상섭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과거 2000년 초 경기침체기를 거치면서 PC산업에선 시장점유율 2위던 델이 컴팩을 제치고 1위에 올라섰고 휴대폰 시장에선 노키아가 부동의 1위를 지킨 것이 좋은 사례”라고 말했다.
글로벌 시장환경이 바뀌었는데 여전히 대량생산체제란 과거의 성장방식이 오히려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미국 애플의 아이팟과 구글의 검색 시스템, 일본 닌텐도의 DS 등 2000년대 이후 ‘메가 히트’ 상품은 모두 시장을 새롭게 창조했다.
정성천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애플, 닌텐도가 최근 고성장을 하게 된 배경도 흉내내기 어려운 자신만의 경쟁무기를 가지고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 열광적인 마니아층을 확보, 미래의 성장 발판을 빠르게 마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투자 늘리고 차세대 산업에 주목하라=삼성경제연구소는 위기 속에도 꾸준한 투자와 함께 차세대 산업에 주목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지난 100여년간 세계 산업을 이끌어온 전통제조업과 금융, 에너지, IT를 기반으로 이들 신산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성표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외환위기 이후 삼성전자와 포스코 등 고성장을 이끈 기업은 설비투자, R&D투자, 시장개척은 물론이고 신성장산업에 투자해왔다”며 “기존 전자통신, 에너지, 금융, 제조업에 더해 건강, 바이오헬스, 환경 등 차세대 유망산업에도 투자를 게을리해선 안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 연구원은 글로벌 기업이 좇는 차세대 사업인 네 가지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첫째는 환경·에너지 분야. 대체 에너지와 바이오 플라스틱, 하이브리드 자동차 등이 대표적이다. 둘째는 정보전자·나노·바이오 등 신소재 분야. 셋째는 실버 산업과 키즈(어린이) 사업, 여성과 신흥국 저소득층을 겨냥한 사업 분야도 거론된다. 마지막으로 다른 분야의 융·복합화를 꾀하는 ‘컨버전스’ 사업이다. 기존 사업과 금융·IT·통신·서비스를 하나로 묶는 시도가 활발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동석·이경민기자 dskim@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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