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다국적 IT기업](하) 탈출구를 찾아라

 “단순한 ‘공급기지’ 역할만으로는 비전이 없다.”

 IT업계는 다국적기업이 과거 고성장 국면에서 매출 확대로 본사에 기여하던 시절을 잊고, 한국법인만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서비스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성장률이 높은 중국·인도, 시장 규모가 큰 일본·호주, 아태지역 거점으로 자리 잡은 싱가포르·홍콩 등에 비해 이렇다할 특성이 없는 우리나라로서는 앞서 있는 IT 인프라를 바탕으로 최신 서비스 모델을 개발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서비스 기지로 거듭나야=우리나라는 성장률은 떨어졌지만 삼성·LG전자, SK텔레콤, 국민은행 등 전세계 어디에 내놔도 떨어지지 않는 훌륭한 레퍼런스 사이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베스트 프랙티스(best practice)’를 개발한 경험을 해외로 내보내야 한다.

 i2테크놀로지코리아는 개발 직원 가운데 절반이 본사가 수행하는 해외 프로젝트에 파견된다. 단순히 국내에 솔루션을 판매하는 것을 떠나 국내에서 쌓은 경험과 기술을 본사에 제공하는 것이다.

 한국HP가 지난 2000년대 초 독자적으로 개발한 비즈니스프로그램 ‘메인프레임얼터너티브(MFA)’도 한 예다. 당시 한국HP는 철옹성 같은 메인프레임 고객을 공략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한국HP는 국내 고객에 맞는 솔루션과 서비스를 묶어 제공하면서 ‘다운사이징 열풍’을 낳을 정도로 성과를 얻었다. 이후 MFA는 전세계 HP 지사가 벤치마킹하는 성공 사례가 됐다.

 i2테크놀로지에서 아태지역 사장을 역임한 형원준 SAP코리아 사장은 “다국적 기업의 현지 법인 대표가 권한을 포기하는 순간 자율권을 상실한다”며 “국내 선진 프로젝트 경험을 살려 글로벌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역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내 기여도 높여야=기업의 속성상 ‘매출’이라는 1차 목적을 간과할 수 없는 만큼 한국법인의 영업 기능을 극대화하되, 그 안에서 국내 산업 발전에 대한 기여도를 높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력 양성이다. 국내에 진출한 다국적기업 가운데 주요 12개사에는 6500여명이 기술인력으로, 혹은 영업인력으로 활동중이다. 이들이 체득한 다국적 기업의 선진 기술과 운영 노하우를 동종업계나 일반 기업에 전한다면 어느 대규모 투자보다 큰 효과를 유발할 수 있다.

 국제구매조달(IPO)을 통해 국내 IT산업과의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도 방법이다. 한국HP는 IPO부서를 통해 국산 반도체, 디스플레이, 모니터 등을 본사에 조달한다. 한국HP의 한국내 IPO 규모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60억달러를 넘어설 전망이다. 델도 연간 50억달러 규모 컴퓨터 부품을 한국에서 구입한다.

 한국IBM 대표 출신인 신재철 LG CNS 사장은 “대부분의 주요 글로벌기업이 글로벌통합 모델에 따라 본사로 결정권이나 인력을 모으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며 “그 안에서 한국 지사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시장 풍토도 바뀌어야=다국적기업이 제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국내 수요자 환경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올초 정권이 바뀌면서 공공사업이 갑작스레 취소·연기되거나 ‘10%’ 비용절감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처럼 불규칙한 시장과 가격 위주의 도입 행태가 지속되선 곤란하다는 것이다.

 특히 저작권을 제대로 존중하지 않는 국내 IT환경이 본사가 국내 시장과 국내 법인에게 불신감을 갖는 가장 주요한 요인으로 꼽히는 만큼 시장 정화 노력도 수반돼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최준근 한국HP 사장은 “해외 기업들은 어닝서프라이즈도 반기지 않을 정도로 불규칙성을 가장 싫어한다”며 “예측 가능한 시장 환경이 조성돼야 외국 기업의 투자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EMC 대표를 지낸 정형문 헤이워드테크 사장도 “국내 기업고객은 우선 싸게 구매하는데만 신경쓴다”며 “이에 따라 다국적기업 본사도 국내 고객과 중장기적인 협력관계를 모색하기 보다는 매출만 신경쓰는 구조로 변해가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유형준·이호준기자 hjyo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