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난 어린이집 또는 유치원의 등록 전날이면 진풍경이 벌어진다. 자녀의 입학증을 받기 위한 학부모의 긴 길줄이 만들어진다. 80∼90년대 소를 팔아 자녀를 대학에 보냈던 우골탑 문화는 2000년대 들어 생이별 문화로 발전했다. 기러기 아빠는 대한민국 교육열의 절정판이다. 매년 20만명의 어린 학생이 조기유학을 떠난다. 자식만큼은 ‘글로벌 인재’로 키우겠다는 부모의 욕심이 낳은 서글픈 현실이다.
LG전자 부장, 차장들 사이에선 ‘영어는 필수’라는 공감대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남용 LG전자 부회장이 취임한 이후 외국인 임원들이 경영의 주요 포스트에 임명되면서 영어 공포가 밀려들고 있다. LG전자 한 직원은 “예전에는 글로벌 기업이 책 속에만 나오는 단어였다”며 “하지만 요즘은 정말 회사가 글로벌 기업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고 전했다.
인재경영이 화두다. 특히 국제감각, 경험 및 언어구사 능력의 삼박자를 갖춘 사람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컨설팅 전문가뿐만 아니라 국내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 역시 틈만 나면 우수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나라 교육열은 세계 최고를 자랑하지만, 아직 글로벌 기준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분위기다. 국내 대기업들은 초일류 기업을 목표로 해외 인력 채용을 늘리면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한발 다가서고 있다.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국경이 무너지면서 지구촌 시대가 활짝 열렸다. 그야말로 글로벌 시대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우리나라에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강력하게 각인됐다. 특히 유럽연합(EU)의 출범과 대륙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무역협정(FTA)은 전 지구를 하나의 시장으로 넓혀놨다.
경동시장, 영등포시장에서 상품을 판매하듯, 브라질과 중국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상품을 판매한다. 상품과 서비스의 자유로운 교역이 가능해진 것이다.
전 세계가 국내 기업들의 활동무대가 됐다. 특히 현지화(localization)는 해외 시장 공략의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각 기업들에서는 현지에서 자사 물건을 팔아줄 글로벌 상인 또는 엔지니어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특히 의사소통 능력은 물론이고 현지 비즈니스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핵심인재 확보는 회사의 명운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견·중소 IT기업들에도 글로벌 인재 유치는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다만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낼 수 있는 인재 유치에 중점을 둔다. 상대적으로 대기업에 비해 총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컴퓨터 프로그램 등의 분야는 인도 인력 수요가 높다. 보안 분야는 이스라엘 인력이 각광받는다.
◇너도 나도 글로벌 인재 강조=“앞으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불문하고 글로벌 인재 확보 경쟁이 격화될 것이다.”
지난 6월 전국경제인연합회 초청으로 한국에서 특강을 한 빌 그린 액센츄어 회장의 말이다. 그린 회장은 “세계적으로 장수하는 기업은 인재를 중시하는 조직문화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인재관리가 기업경쟁력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최고의 기업은 언제나 사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남용 LG전자 부회장은 프랑스 파리 하이엇호텔에서 국내외 법인 인사(HR)담당 임직원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글로벌 HR 콘퍼런스’에서 이같이 밝혔다.
그는 “최고의 인재가 최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회사가 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해 달라” “LG전자를 최고의 인재들이, 최고의 팀을 이뤄, 최고의 성과를 내는 ‘The People Company’로 만드는 것이 내 사명이다”라고 강조했다.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역시 “자동차는 아무리 잘 만들어도 객체다. 모든 일의 주체는 사람이다. 훌륭한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훌륭한 인재부터 양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기아차는 지난 2002년부터 매년 미국, 유럽 유명대학의 석·박사급 인재를 영입하고 있다.
◇대기업 글로벌 인재경영 현황=대기업들은 해외 인력 채용을 정례화하는 등 글로벌 인재 유치에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특히 인재관리가 기업경쟁력의 핵심으로 떠오르면서 국내 주요 그룹사들의 글로벌 인재 유치 경쟁도 질적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외국인 인사 담당 임원이 해외 인력을 선발하는 시스템이 도입되는 등 인재유치 방식 또한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 미국법인은 2005년부터 서울 본사처럼 대졸 신입사원을 공채로 채용하고 있다. 해외법인도 ‘소규모 수시 채용’ 방식으로는 우수 인재 확보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탓이다. 삼성전자는 현재 56개국 124개의 법인 및 지사에서 약 5만9000명의 외국인 인력이 일하고 있다.
삼성 계열사들은 올해 들어서도 S급 우수인력 스카우트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수년 전 스카우트 팀을 ‘인재개발연구소’로 확대 개편하고 인재확보에 전사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삼성이 인재 영입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은 각 분야의 준천재 이상급의 인재 확보가 21세기 ‘두뇌 전쟁’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는 최고위층의 지론에 따른 것이다.
삼성은 S(Super)급, A(알파벳의 첫 글자)급, H(High Potential)급의 3계층으로 이뤄진 ‘인재 풀’을 구성하고 천재급 인재를 유치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는 전체 임직원 5만9000여명 중 외국인이 약 500여명이다. 이 중 3%가 S·A·H급 인재로 구성돼 있다.
삼성전자는 일단 핵심인재를 확보하면 초특급 대우로 모셔온다. CEO보다 연봉이 두세 배 높은 경우가 다반사다.
LG전자는 글로벌 기업으로의 변신에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최고마케팅책임자(CMO·더모트 보든), 최고구매책임자(CPO·토머스 린턴), 최고공급망관리책임자(CSCO·디디에 셰네보) 등 핵심 경영진에 한국기업으로는 이례적으로 외국인을 잇따라 영입했다.
이른바 ‘C레벨’ 경영진 7명 가운데 최고경영자(CEO)인 남용 부회장과 백우현 최고기술책임자(CTO·사장), 정도현 최고재무책임자(CFO·부사장) 3명을 제외한 4명이 외국인으로 채워졌다.
능력이 되면 국적과 성별을 가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영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회사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되고 있다. LG전자는 2010년까지 82개 해외법인장 중 최소 30%를 외국인으로 임명할 예정이다.
SK그룹은 글로벌 인재를 확보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탤런트 매니지먼트(TM)’라는 전담조직을 만들었다. 미국 하버드대 석·박사 출신이면서 다국적 컨설팅회사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 등 7개사에서 25년간 인력관리 업무를 맡은 린다 마이어스가 조직의 수장으로 영입됐다.
마이어스는 SK그룹의 핵심인재 선발 및 관리 기준을 마련하고, 관계사 간 핵심 인재 교류도 활성화하는 등 인재 관련 업무를 총괄한다.
SK텔레콤은 지난 5월 조직 문화를 글로벌 기업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제너럴일렉트릭(GE) 등에서 30년간 인사 및 조직개발 업무를 담당했던 미국인 스테픈 프롤리를 글로벌 조직개발 담당임원으로 영입했다.
김원석기자 stone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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