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0여년 동안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방송과 통신분야의 전자미디어는 폭발적인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왔으며 미디어 융합은 이 같은 성장의 최근판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이름을 거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방송과 통신을 아우르는 수많은 미디어가 줄을 잇고 있으며 여기에 유비쿼터스 시대까지를 고려한다면 미디어 융합환경에서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새로운 매체와 서비스가 등장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이 같은 미디어 융합의 흐름은 전통적 차원의 통신·방송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미디어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이 새로운 환경을 두고 정부·국회 등의 정책당국자·전문가·학자·해당 기업·관련 연구소 등을 중심으로 혼란스러운 정책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이는 미디어와 정보통신기술의 확대 성장에 근본적으로 내재돼 있는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한 요소 때문에 빚어지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또 새로운 미디어 전개상황을 질서있게 규율할 수 있는 정책체계를 모색해 보려는 시도에서 이러한 혼돈은 일정 부분 당연한 과정이기도 하다.
융합으로 빚어지는 혼돈의 핵심 배경은 ‘미디어 과잉’이라는 사회적 현상이다. 미디어 포화상태를 두고 사회적 문제 제기는 오래 전부터 있어 왔지만 융합 환경에서 그 범위와 비중이 훨씬 확대·심화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업자와 정책 당국자는 물론이고 사회구성원 모두가 폭발적으로 개발·확산·수용되고 있는 미디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또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하는 문제가 더욱 강하게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필요한 작업은 미디어를 보는 우리의 인식을 되짚어보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미디어는 사회적·문화적·정치적·경제적·기술적 도구의 집합체로 인식된다. 쉽게 말하면 미디어를 내용 전달과 소통의 매개, 정보 격차의 해소와 사회통합, 산업·경제적 부가가치 창출 등의 목표달성을 위한 도구의 집합 정도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를 개인·사회적 유용성에 기초한 도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미디어 빅뱅·매트릭스 시대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철학적 토대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우리가 익히 목도하고 있듯이 오늘날 미디어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개인의 생활과 사회 전반에 깊숙이 침윤되면서 삶과 사회를 조건짓는 거대한 환경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으며 유비쿼터스 미디어 시대는 이를 극명하게 입증하는 사례가 될 것이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환경은 기후·풍토·생물학적 인자의 복합체로서 개별 유기체 또는 유기체의 집합에 작용해 유기체의 생존형태, 나아가 생존 자체를 결정하는 총체적 체제를 지칭한다. 이 같은 자연의 생태환경과 함께 한 사회, 나아가 지구적 범위에서 인간의 집단·개인적 삶의 터전을 형성하는 또 다른 조건은 문화적 생태환경이다. 문화적 생태환경은 삶의 질과 연관된 상태로서 중요하며 이것이 어떠한 양상으로 구축돼 있는지에 따라 개인과 공동체의 삶의 질서와 양상이 달라지게 된다. 미디어는 바로 이 문화적 생태환경을 결정짓는 핵심요건 중의 하나다.
미디어를 이처럼 환경으로 바라보는 인식은 미디어를 문화적 삶의 터전이라는 관점으로 전이시켜준다는 의미가 있다. 또 환경론적 관점에 입각한 문제의식은 미디어 행위자 모두에게 사회의 문화적 설계에 책임을 지닌 시민으로서 미디어의 사회적 이익 실현을 위한 개입의 기준점을-정책 수립과 집행, 관련 사업자의 경영행위, 콘텐츠의 수준과 내용, 개인의 미디어 사용 행태 등에 적용될 수 있는-제시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융합과 관련해 현안으로 대두되는 긴급한 쟁점의 논의도 요긴하지만 철학적 차원에서의 미디어에 대한 성찰 또한 같은 비중으로 논의돼야 할 과제다.
<단국대학교 언론영상학부 김평호 교수 pykim@danko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