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PDP·LCD 등의 등장으로 브라운관(CRT) 산업이 사양 길에 접어들면서, 세계 브라운관 1, 2위 업체인 삼성SDI와 LG필립스디스플레이는 불필요한 소모전을 피하고 시장을 지키기 위해 17인치 모니터용 브라운관·29인치 슬림브라운관 부품의 규격을 통일했다. 또 삼성SDI는 21인치 슬림형 브라운관에, LG필립스디스플레이의 설계기술을 적용한 후면 유리를 한국전기초자로부터 공급받기도 했다. 비록 기술 발전의 흐름 속에서 브라운관은 역사의 뒤안길에 접어들고 있으나, 두 회사는 표준화와 협력을 통해 그 수명을 늘리고 있다. 업계에서는 두 회사의 협력이 사양길로 접어들기 이전에, 특허 크로스라이선스 등으로 보다 폭넓게 확대됐다면 디스플레이분야에서의 영향력은 한층 커지고, 더욱 길게 유지됐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전하고 있다.
#2 국내 디스플레이 장비업체 Z사는 국내 대기업 A사에 납품하고 있다. 최근 일본·대만 등 외국 디스플레이업계로 판로를 확대했다. 공격적인 R&D 투자로, 해외 장비와 견주어 가격 대비 성능이 탁월한 제품을 개발해 낸 덕택이다. 하지만 유독 국내 대기업 B사에 만은 판로를 뚫지 못하고 있다. 장비 성능은 객관적으로 입증됐지만, 수직계열화라는 국내 관행을 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지금은 체념 상태다. 국내 대기업 모두에 장비를 공급하고 있는 미국·일본·유럽 등 장비업체들이 부러울 뿐이다. 사실 대기업 A사도 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 지금까지의 관행 때문에 B사에 납품하고 있는 국내 장비업체 Y사 제품을 채택하지 않고 있으나, 언제까지 국산 장비에 비해 가격이 비싼 외국 장비를 사용함으로써 가격경쟁력을 갉아 먹을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세계 디스플레이업계 최대 라이벌인 삼성과 LG가 손을 맞잡았다. 또 이들이 주축이 된 디스플레이산업협회는 ‘8대 상생협력 결의문’을 채택, 특허·구매·표준화 분야에서 대기업이 상호 협력하고 후방 산업의 성장을 저해하는 수직계열화 관행의 타파에도 공동 노력키로 했다. 이는 대·대기업 협력을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고, 대·중소기업 협력을 기반으로 디스플레이산업 경쟁력의 원천인 장비·재료산업의 경쟁력을 제고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이같은 대·중소, 대·대간 ‘복합형 상생협력’에는 ‘타도 대한민국’을 외치며 따라 붙고 있는 일본·대만을 따돌리겠다는 포석도 깔려 있다.
특히 상생의 플랫폼인 이번 디스플레이산업협회 창립을 계기로, △대기업들의 중소 협력업체 공동 활용 △그룹 계열사 중심으로 진행된 폐쇄형 거래관계 청산 △과열경쟁에 따른 중복투자 등의 문제가 개선될 수 있을 지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강할 때 미래에 대비하자.’
디스플레이산업협회 창립을 계기로 삼성전자·LG필립스LCD·삼성SDI·LG전자 등 패널 4사가 채택한 ‘상생협력 결의’의 배경이다. 결의문은 표준화·상호구매·특허 등에서의 협력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다.
사실 세계 디스플레이업계에서 이같은 수준의 협력은 일반화돼 있다. △삼성전자-소니(S-LCD설립) △마쓰시타-도시바-히타치(IPS-알파설립, 6세대공동투자) △NEC-SVA합작(SVA-NEC) △IVO-BOE-SVA(중국 3대 패널업체 합병추진) △샤프-CMO/CPT(기술이전/특허제휴) △샤프-TCL(7세대이상 공동투자) 등 그 대상과 내용도 다양하다.
이미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기업들간 이같은 전략적 제휴의 목적은 자명하다. R&D·특허·생산·마케팅 등 비즈니스 전반에서 지배력을 확고히 하기 위한 것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더이상 독불장군은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이 배경에 깔려 있다. 이런 의미에서 디스플레이분야 세계 1, 2위 기업인 삼성·LG의 연합전선 구축은, 세계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다.
디스플레이분야 대대협력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기판 표준화다. 디스플레이업계 한 고위관계자는 “국내 디스플레이업계는 지금까지 우리 기업끼리 너무 과도한 패널크기 표준화 경쟁으로 벌여온 것이 사실”이라며 “표준화 경쟁은 차별화 전략이기도 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우리 기업간 과도한 경쟁은 고비용 생산구조를 낳았고 투자 리스크도 증가시키는 요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국내 기업이 기판 표준화에 합의하게 되면 패널업계는 △시장 주도권 강화 △해외 장비재료 구매시 바잉파워 증대가 가능해진다.
하지만 국내 기업간 기판 표준화가 시급한 더 큰 이유는 ‘학습비용’은 국내 패널기업이 부담하고, 후발주자인 대만패널업체는 이미 검증이 끝난 기판사이즈를 자유롭게 취사 선택함으로써 가격경쟁력을 확보하는 기형적인 구조에 있다. 더욱이 특단의 조치가 없는 한 이같은 현상은 LCD 8세대 이후와 차세대 디스플레이 분야로까지 이어져 한국 디스플레이산업의 경쟁력을 좀 먹는 요소로 계속 남게 된다.
대기업 간 패널 상호구매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지금까지 삼성전자와 LG전자 모두, 단 한 차례도 경쟁계열사인 LG필립스LCD와 삼성전자 LCD의 패널을 구매한 적이 없다. 자사가 생산하는 규격이 아닌 LCD 패널이 필요하거나, 물량부족으로 내부 조달이 힘든 때에도, 물류 부담까지 안아가며 차라리 대만 LCD 패널을 택했다. 지나친 국내업체간 경쟁으로 대만업체가 반사이익을 얻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대만업체로부터의 TV패널 수입비중은 지난해 4분기 기준으로 삼성전자가 54%, LG전자 31%에 이른다. 이번 대대협력 결의로 삼성전자·LG전자 등 세트업체는 국내 경쟁계열사인 LG필립스LCD와 삼성전자 LCD총괄의 패널을 구매하는 ‘거래선 개방’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돼 그 성사 여부에 관심이 모아진다.
대대협력의 또 하나의 관심사는 국내 대기업간 전략적인 특허 제휴다. 경쟁이 심화되면서 경쟁업체들은 특허 크로스라이선스를 통한 기술 제휴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어, 세계 디스플레이업계에서 특허 협력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 샤프-CMO/CPT(대만), 삼성전자-소니, 일본 PDP업계의 특허풀(HPPL) 운영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국내 기업들도 이처럼 이미 일부 해외경쟁사들과는 특허 크로스라이센스를 맺고 있으나, 유독 국내 기업간 특허 협력을 찾아 보기 힘들다. 이번 상생협력 결의문에 특허 협력이 포함된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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