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한미숙 헤리트 사장(1)

인간 삶의 과정을 산에 오르는 것에 많이 비유한다. 아마도 등산길에 만나는 흙, 나무, 바람, 헐떡고개, 평지, 내리막 등이 인간의 희로애락을 닮아서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인생과 등산이 다른 것이 있다면, 인생은 삶의 전환점에서 한번의 선택만 존재하지만 등산은 몇 번이고 코스를 달리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필자는 80년대 초에 여성으로 이공계를 전공하고 14년간이나 여성 엔지니어로 생활을 하다 IMF 이후 벤처 버블이 꺼질 무렵인 2000년에 창업을 단행했다. 여성으로서는 거의 처음으로 남녀를 아우르는 기업 단체(중소기업기술혁신협회)의 장이 되기까지 크고 작은 결단을 하며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꺼내놓을 만큼 성공적으로 이룬 것도 없고 앞으로 이뤄가야 할 일이 더 많은 사람인 관계로, 이러한 글을 쓴다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조심스럽게 내 인생의 결단의 순간들을 이어보려 한다.

 여고 3학년이던 82년 초, 친구와 함께 겨울바람을 맞아가며 청주로 향했다. “여성은 뭐니 뭐니 해도 안정적인 직장이 최고다. 선생이 되라”는 부모님 말씀에 따라 사범대에 입학원서를 넣으러 가던 길이었다. 당시만 해도 집이 있는 옥천에서 청주로 직행하는 버스가 드물어 우선 대전으로 갔다가 청주행 버스를 갈아타고 두 시간도 넘는 길을 빙빙 둘러서 가야 했다.

 그런데 아뿔싸. 소중히 챙겨둔 원서가 보이지 않았다. 대전행 버스에 두고 내린 모양이었다. 돌아가서 찾아온다 해도 접수 시한에 맞추기는 불가능했다.

 이러한 연유로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전자계산학과를 택하게 되었고 이것이 내 인생의 첫 번째 터닝 포인트였다. 인생에 있어 지난 과거의 삶에 ‘만약(if)’이 있을 수 없지만, 이때의 전환기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운 좋게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 입사했다. 입사 후 지방대학 출신에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물밑에서 끊임없이 발을 놀리고 있는 백조처럼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다.

 입사 후 처음 맡겨진 일은 서류 복사에 잔심부름 수준이었다. 온통 해외 유학파 박사들과 서울대, KAIST 출신들이 수두룩한 상황에서 실력을 누가 알아주겠는가.

 하지만, 필자는 이렇게 실력 있는 선배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걸 감사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노력한 덕에 선배들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주로 전자교환기(TDX)부터 품질보장형라우터(MPLS) 연구개발에 이르기까지 다루며 어느새 통신네트워크 분야의 ‘진짜배기 엔지니어’로 거듭났다.

 통신 분야의 올림픽으로 불리는 국제적 심포지엄 ISS(International Switching Symposium)에 ‘IP 품질보장형 라우터 MPLS(멀티 프로토콜 라벨 스위칭)’에 관한 논문을 발표할 만큼 엔지니어로서는 나름대로 전문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ETRI는 필자의 전문성과 새로운 도전을 이뤄갈 수 있도록 역량을 키워준 소중한 친정이다.

mshan@heri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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