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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나올 것이라 예상했다. 나온다면 그가 첫번째 저자일거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홍식 LG데이콤 부회장(62)이 ‘드디어’ 책을 냈다. 우리나라 IT정책사를 생생하게 기록한 ‘한국IT정책 20년(전자신문사 펴냄)’. 백서는 있지만, 개인 치적을 내세운 에세이는 있지만 20년의 역사를 관통해 IT정책을 설명한 책은 처음이다. 더욱이 ‘야사’가 아닌 당시 IT정책 입안 및 집행과정을 담담하게 서술한 ‘정사’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대부분의 명망가가 구술을 통해 책을 내는 것과는 달리 이 책은 정 부회장이 1년 동안 직접 글쓰기에 매달린 소중한 결과물이다. “일본에는 이미 200∼300권의 IT 정책자료서가 나와 있지만 우리나라는 한 권도 없었습니다. 외국의 친구들이 ‘왜 한국은 IT강국이라면서 그런 책 하나도 없냐’고 물을 때 머쓱하더군요. 그런데 왜 하필 내가 써야 하나를 스스로에게 물었지요. 결론은 저밖에 없더군요. 10년 동안 청와대에서 IT정책을 실행하고, 또 같은 일을 체신부와 정보통신부에 가져와 10년동안 일한 ‘IT 20년 공무원’은 저뿐이었습니다.”
#1 기록·보관의 달인
정 부회장이 보여줄게 있다며 들어간 회사의 작은 서재에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문서부터 80년대의 정책 입안서, 90년대 정통부 시절 각종 서류까지 빼곡하게 차 있었다. 싯누렇게 색이 바랜 문서도 곳곳에 눈에 띈다. 정 부회장이 직접 기록한 메모도 들어있고, 대통령이 당시 브리핑을 받으며 기록한 생각들도 글로 남겨져 있다. 87년 업무노트 한권을 펼치니 20년 전 회의상황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중간에 ‘힘들겠군∼’이라는 글귀도 눈에 띈다.
다른 노트를 펴니 사진이 한 장 ‘툭’ 떨어진다. 세 명의 어린 아이들이 올망졸망 소파에 앉아 장난스레 웃고 있는 모습. 지금은 성인이된 세 아들의 어린시절 사진이다. 그러고 보니 단순한 자료실이 아니라 추억이 살아있는 공간이다. 서류만도 파일박스 8개나 되는 저 문서를 어떻게 다 보관했을까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무슨 마니아나는 아니지만 일단 들어오면 버리지는 못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일기장을 아직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지요.” 그동안 나온 명망가들의 책이 왜 개인 치적으로 흘렀는지 알 것 같다. 저렇게 수십년 동안 자료를 충실히 보관하고, 일정기간 정리해놓지 않는다면 내용이 없어서라도 개인사에 치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2 과거가 아닌 현재
책으로 들어가보자. 책안의 세상은 과거다. 1980년부터 1998년 봄까지의 기록이다. 1986년 ‘최첨단 반도체 국내 개발 성공보고’라는 문건(131쪽)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삼성 이병철 회장께 축하한다는 전화 해드리고 그전에 금성에서 기보고한 바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되었나’는 친필 메모가 있다. 당시 삼성반도체통신이 1MD램 반도체 국내 개발에 성공했다는 내용을 보고받은 뒤였다. 요즘 반도체개발이 수십나노D램에 이른 것을 보면 정말 ‘그때를 아십니까’ 수준의 과거 얘기로 들린다.
그러나 책은 단지 과거가 아니다. “1990년대 들어 방송과 통신의 융합추세가 두드러지고 있어 기존의 낡은 역무구분은 현실적 정합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책 179쪽) “통신사업자에 대한 정부의 규제나 간여는 최소화돼야 한다는 것이 일관된 생각이었다. (중략) 그 방향은 모든 규제를 ‘불가피하지 않는 한 폐지한다’는 것으로 정했다”(185쪽).
지금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는 규제완화와 통·방융합의 문제의식이 10여년 전에도 고민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SW 육성이나 반도체산업의 메모리 편중 문제도 마찬가지다. 다시말하면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는데도 정책은 그때의 숙제를 아직까지도 풀지못한채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그래도 정 부회장은 IT는 우리나라에 주어진 축복이라고 말한다. 천시와 지리와 인화가 어우러져 지금의 거대한 IT산업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역대 대통령 누구 하나 IT정책에 소극적인 사람이 없었다. 당리당략에 IT가 휘둘린 적도 없다. 그만큼 정치중립적이었기 때문에 정권이 수 차례 교체됐지만 IT에 대한 정책이 일관되게 집행됐다는 것이다. 특히 80년대 당시 정 부회장, 홍성원 박사를 비롯한 IT전담 공무원이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지 않고 10년 이상 호흡을 할 수 있었던 점이 큰 동력이 됐다. 소위 ‘좋은 보직’이었다면 서로 자리다툼을 하느라 2∼3년 만에 담당이 교체됐을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IT가 인기업무가 아니었던 덕분에 심화된 IT정책을 지속적으로 내놓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명예도, 돈도 아니지만 일하는 보람 하나로 IT정책에 몰입할 수 있어 기뻤습니다.”
#3 누구든 글쓰기해야
정 부회장은 요즘도 꾸준히 걷고 오른다. 아침 매일 1시간 양재천 부근을 걷고, 주말에는 어김없이 친구들과 산을 찾는다. 세상 흐름에도 꾸준히 따라가려 한다. 요즘 뜨고 있는 사용자제작콘텐츠(UCC)에 대한 관심도 많다. 또 선임자인만큼 후배들을 위해 IT부문에서 뭔가 도울 게 없을지도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미뤄서는 안될 숙제도 꼼꼼히 챙긴다. 1998년 이후의 자료를 정리하는 작업이다. 물론 책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냥 기록하고 정리하는 습관 탓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름깨나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쓰고, 책을 낸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 자기 현업에 오랫동안 일해온 모든 연구원·전문가·기술자·기업인도 글을 쓰고, 책을 내고, 기록을 남겨야 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비행기가 떨어질 때도 기록한다는 얘기도 있잖습니까. 그게 결국 역사이고, 또 미래입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 언제 나올지 모르는 그의 두 번째 책을 가장 먼저 읽는 독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인혜기자@전자신문, ihcho@
◆정홍식 부회장은…
1945년 인천에서 태어나 제물포고등학교와 연세대에서 경제학 학사, 경영학 석사를 마쳤다. 1971년 행정고시 10회로 합격해 국무총리기획조정실로 공무원 생활에 첫발을 디딘 후 1979년부터 10년 동안 대통령 비서실에서 IT정책을 실행하는 업무를 맡았다. 1991년 정보통신국 국장으로 체신부에 들어온 뒤 1994년 정보통신부 탄생에 산파 역할을 했으며 1998년에는 정보통신부 차관을 역임했다. LG 통신사업 총괄사장, 데이콤 사장을 거쳐 현재 LG데이콤 부회장으로 재직 중이며 김정숙 여사와의 사이에 3남을 두고 있다. 선이 굵은 보스형으로 업무 장악력과 추진력이 돋보이면서도 사람에 대한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는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