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8년 박희재 서울공대 교수가 창업한 LCD장비업체 에스엔유프리시젼은 작년 1월 코스닥에 상장하면서 한바탕 유명세를 치렀다. LCD장비 분야의 기술력이 돋보였지만 정작 과학기술계 인사들은 교수가 성공적으로 벤처기업을 일군 비결이 무엇일까 궁금해했다. 성공적인 교수 창업의 사례가 많지 않은 현실을 감안할 때 벤치마킹의 유혹을 느꼈을 것이다.
박 교수는 첨단 LCD장비를 개발한 후 납품처를 찾지 못해 동분서주하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하다. 기업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교수라는 ‘계급장’을 떼는 일이었다고 한다. 영업의 고수들이 겨루는 강호의 세계에서 교수라는 명함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웠다. 사업자등록증을 받기 위해 방문한 구청의 공무원은 교수가 웬 창업이냐며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8년이 지난 지금은 관악구 소재 기업 중 법인세를 많이 낸 기업에 꼽힌다고 하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올 초에는 재정경제부 장관이 주는 모범 납세자 표창도 받았다. 박 교수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상이다.
사업 초창기 납품처를 찾지 못해 애태울 때 박 교수가 돌파구로 생각한 곳이 일본이다. 우선 관련 전시회에 개발제품을 출품키로 했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어렵게 확보한 자금을 아끼기 위해 개발장비를 분해해 동반한 제자들한테 나눠준 후 비행기에 탑승했다. 제자들한테는 속옷을 여러 장 겹쳐 입고 나오라는 당부도 했다고 한다.
일본 전시회에서 박 교수는 고정 거래처를 확보하는 첫 결실을 얻었다. 물론 일본 업체의 문턱을 수도 없이 드나들었다. 그래서 얻게 된 사업 좌우명이 ‘百聞不如一見, 百見不如一行, 百行不如一注’다. 거래처를 백 번 방문해야 한 번 주문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란다.
박 교수는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과학자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자주 인용한다. 다음은 그가 이탈리아의 한 성주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 내용이다. “대공 전하! 제가 갖고 있는 아이디어와 신기술에 대해 흥미가 있으시다면 편하신 시간에 그것을 증명하고 시연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매우 가볍고 튼튼한 교량을 건설하는 기술이 있으며 이 기술은 적의 포탄으로부터 안전하며 적의 교량을 쉽게 파괴할 수 있습니다. 또 저는 적의 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해자의 물을 빼는 배수기술도 있습니다.” 당시는 유럽의 패권을 놓고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이 대치하던 때다. 다빈치는 시대정신에 충실했고 마케팅 개념을 이해했던 실사구시형 인물이라는 게 박 교수의 생각이다.
눈을 돌려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자. 연구소와 대학은 국내 박사학위 소지자의 80% 이상이 집중돼 있는 곳이다. 기초 및 응용과학 분야 연구 성과물이 대부분 이곳에서 나온다. 정부 R&D 예산이 여기에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많은 기술이 연구소나 대학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사장된다는 게 문제다. 정부의 ‘기술사업화’ 정책은 이를 해소해 보겠다는 의도로 추진되는 것이다. 첨단기술을 시장이라는 공간으로 끌어들여 성장의 동력으로 삼겠다는 전략이다. 이런 측면에서 연구소기업과 대학 창업기업들이 장려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답답하기 짝이 없다. 연구소 기업은 태동 단계에 불과하며 대학 내 창업 열기는 예전만 못하다. ‘연구소와 대학은 원천기술 연구, 기업은 상품화 연구’라는 이분법이 여전히 맹위를 떨친다.
연구소와 대학의 기업 마인드 확산, CEO형 인력 확보와 전담조직 운영, 연구원의 창업 지원 강화 등 해법이 제시된다. 하지만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린다. 왜일까.
장길수 논설위원 ksja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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