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의 한 복판에 서 있던 뉴요커들은 물론, 민간 여객기가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충돌한 뒤 불길이 불타오르고 얼마 후에는 순식간에 붕괴돼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생방송으로 지켜본 전세계의 수많은 시청자들은, 그때의 충격과 비극적 참사를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백악관으로 향하던 ‘UA93’이 펜실베니아 평원에 추락한 것을 제외하고는 납치된 3대의 비행기가 모두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했다. 영국에서 만들어진 9·11 영화 ‘UA93’과는 달리, 미국 내의 정치적 문화적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영화를 만들었던 ‘플래툰’‘도어스’‘JFK’‘닉슨’의 올리버 스톤 감독이 만든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는, 이 사건을 바라보는 미국민의 평균적인 시선이 담겨 있다. 그것은 어떤 목적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테러에 대한 분노이며, 역경과 고난을 이기고 희망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평범한 소시민들에 대한 찬가이다.
이작품에선 9·11이 극우파들에 의한 자작 시나리오라는 음모론이나 부시를 공격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의 시선도 담겨 있지 않다. 테러 그 자체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그리고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9·11 당시 건물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월드 트레이드 센터로 자원해 들어갔던 뉴욕 경찰관 존과 윌의 생존 실화를 중심으로 풀어간다.
존 맥라글린(니콜라스 케이지 분)은 21년 경력의 뉴욕 항만경찰청 베테랑 경사다. 비행기가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충돌한 후 그에게 출동명령이 떨어진다. 존과 윌 히메노(마이클 페냐 분)을 비롯해서 4명의 대원들이 빌딩 내부로 들어가는 것을 자원한다. 그들은 보호장구를 갖춘 뒤 사상자와 무너진 빌딩의 잔해로 아수라장이 된 월드 트레이드 센터로 진입한다.
그러나 구조작업 도중 추가로 무너진 빌딩 잔해에 다른 두 명의 대원이 깔려 숨지고 존과 윌만 살아남는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의식만 있을 뿐 육체는 거대한 돌더미에 깔려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구조의 손길은 다가오지 않는다. 두 사람은 서로 잠들지 말라고 격려하면서 구조대원들이 자신들을 발견해 주기를 기다린다.
올리버 스톤 감독은 정치색을 버리고 9·11을 소재로 한 휴먼 드라마를 만들었다. 그가 왜 세계 정치사의 거대한 분수령을 기록한 9·11에서 정치적 시선을 거두었을까?
‘JFK’에서는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가 진보적 정치인이었던 케네디를 암살했을지도 모른다는 대담한 가정을 던졌고, ‘닉슨’에서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정면으로 파헤치며, 정직하지 못한 지도자의 종말을 참담하게 그려낸 올리버 스톤 감독이, 무슨 이유에서 9·11을 비정치적 시각으로 접근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9·11에서 정치적 색채가 빠지고 테러리즘에 대한 사상적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자, 영화는 거대한 곤경에서 살아남는 재난 영화 혹은 휴먼드라마가 되어버렸다. 실화이기는 하지만, 존과 윌의 생환과정을 통해 감독이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가족의 가치였다.
할리우드의 가장 위대한 주제인 가족의 소중함이라는 가치를 부각시키면서 올리버 스톤 감독은 이 영화가 대중적 지지와 상업적 흥행을 획득할 수 있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9·11은 결코 정치적 시각과 무관할 수 없다. 근본 원인이 제거된 드라마는 뿌리 깊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서 우리가 눈길을 거둘 수 없는 이유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고난을 이겨낸 영웅들의 이야기가 진솔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비정치적 접근의 한계를 우리가 아무리 비판한다고 해도, 영화가 갖고 있는 감동의 무게를 지워버릴 수는 없다.
니콜라스 케이지와 마이클 페냐가 연기하고 있는 존과 윌은 이 사건을 바라보는 미국 중산층의 평범한 시각을 대변한다. 생각할 수도 없는 위험에 빠진 가장, 그리고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그의 가족들. 영화는 가족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춘다.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된 민간 비행기가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자살 충돌해서 수 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건물 속에 있다가 생존한 사람은 단 20명에 불과했다. 존과 윌은 각각 18번째와 19번째 생존자다.
실화를 소재로 한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이제 막 시작된 9·11의 영화적 접근의 문을 여는 작품이다. 올리버 스톤 감독은 첫번째 문을 열면서 정공법으로 가장 평범한 이야기를 통해 사건의 비극성을 알리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영화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 s2jazz@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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