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정상은 중앙정보처리학원그룹 회장(4)

(4) 과잉투자 위험도 불사

우리나라가 IT강국으로 불리우는 지금도 그렇지만 컴퓨터 도입 초창기때는 선진국의 기술변화와 어디에 어떻게 이용되어지는가를 아는게 꼭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76년에 국내 최초의 컴퓨터 전문잡지인 ‘월간 컴퓨터’를 창간했다.

컴퓨터 전문잡지의 발행은 경제적 부담은 있었지만 새로운 교육 과정을 더 빠르게 개발하는 데 도움을 줘 학원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단기 교육에 의한 초급요원 양성으로 시작됐던 것이 교육 기간도 6개월, 8개월로 점차 길어졌고 고급 기술자를 양성할 수 있는 데까지 발전하게 됐다.

그러자 새로운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점점 어려워지는 강의 내용을 따라가기 힘들어진 수강생들이 중도에 포기하는 사례가 늘어난 것이다. 운영상에 심각한 문제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고급 기술자 양성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학생들의 이해도를 향상시켜 진급률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컴퓨터 공부는 마치 수학과 같아 앞에서 배운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다음은 전혀 알 수 없어 하루만 결석해도 따라가기 힘든 특징이 있다. 그런데도 매월 수강생으로부터 수강료를 받아야 하는 학원은 수강생을 다음 과정으로 진급 시키기 위해 학생들의 비위를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는 학생 스스로 노력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다음 과정으로 진급을 완전히 반대로 하기로 했다. 수시로 시험을 봐 성적이 나쁘면 제적했으며 숙제를 안 해 오거나 수업 태도가 나빠도 제적하기로 했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 학생은 가르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처음에는 불만도 항의도 많았으나 실력이 점차 향상되기 시작하자 자신이 생긴 수강생들이 고급 과정까지 도전하게 됐고 진급률은 놀랍게 향상됐다. 고급 과정의 수익성도 몰라보게 개선됐다. 그후 엄격한 교육은 우리 학원의 전통이 됐으며 우수 인재를 배출하는 명문 교육기관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고급 과정의 운영이 본 궤도에 오르자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때까지 사용하던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컴퓨터 터미널만으로는 학생들에게 충분한 실습 기회를 주기 힘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학생 실습용 대형 컴퓨터를 도입할 필요가 생겼지만 문제는 학원이 그 비용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점이었다.

수십 억원의 도입 비용도 그렇지만 각 지역에 분포된 학원에 별도의 전용회선으로 터미널을 설치해야 했으며 수시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 시켜야 하고 먼지없는 방에 온도,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시켜야 하는 등 유지, 관리 비용도 큰 문제였다.

학원 규모가 더 커진 후에 도입하는 것이 순서겠지만 순서대로 하는 것이야 누구는 못 하겠는가. 규모가 커질 때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형 컴퓨터 도입이 학원의 규모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릴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 판단한 나는 81년 과잉 투자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형 컴퓨터를 도입했다. 여러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다행히 그후 PC의 보급으로 때맞춰 일어난 컴퓨터 붐과 함께 학원의 규모는 예상보다 더 빨리 성장해 국내 컴퓨터 전문요원 양성을 거의 독점하는 계기가 됐다.

사업은 조심성도 있어야 하지만 과감히 도전하는 결단은 더욱 필요하다. 토끼처럼 조심하되 때로는 호랑이처럼 용감하게.

jse@choongang.co.kr

사진: 중앙정보처리학원이 1981년 도입한 실습용 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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