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축가의 임무는 외관을 스케치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근대건축의 선구자 헨드릭 페트루스 베를라헤(Hendrik Petrus Berlage)의 말이다. 건축의 본질은 겉모습이 아니라 그 안의 삶에 있다는 의미다.
좋은 건축가는 집을 지을 때 최신 공법이나 화려한 자재부터 고민하지 않는다. 대신 그 공간을 채울 사람들을 먼저 상상한다. 이 문을 누가 가장 자주 열게 될지, 아이들의 발걸음은 안전할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집 안의 온기와 어울리는지를 살핀다. 용도와 환경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건물은 겉보기에 화려할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불편과 비효율이라는 민낯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결국 좋은 집을 짓는 일의 성패는 '기술'이 아니라 그곳에 살 '사람'에 대한 이해에 달려있다.
국가가 짓는 행정이라는 집도 마찬가지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에서 관세행정은 우리 국민이 초국가 범죄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몸을 녹이고, 기업이 무역 현장에서 힘을 낼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든든한 보금자리가 돼야 한다. 2022년 챗GPT의 등장 이후 인공지능(AI)에 대한 관심과 기대는 어느 때보다 높아졌지만, 기술을 덧칠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기술이 국민의 삶을 어떻게 이롭게 할 수 있는가”라는 본질이다. 관세청이 2026년 추진하는 AI 관세행정 정보화전략계획(ISP)은 그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이자, 국민이 오래도록 믿고 머물 수 있는 '미래 관세행정의 집'을 짓기 위한 밑그림이다. 이때 흔들리지 않을 기준이 되는 것이 다음 다섯 가지 방향성이다.
첫째, 업무의 결을 밑바닥부터 다시 그린다. 집의 구조는 사는 사람의 동선에 맞춰야 하듯 행정도 국민과 기업의 편의를 고려해야 한다. 현재의 업무 절차 속에 숨어 있는 비효율의 먼지를 털어내고 국민과 기업이 어디에서 불편을 겪고 있는지를 차분히 살펴보고자 한다. 단순히 사람이 하던 일을 기계에 넘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판단과 책임이 요구되는 영역과 AI가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영역을 구분하고 그에 맞는 업무 절차와 흐름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할 것이다. 통관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반복되거나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는 절차는 AI로 과감히 생략하거나 간소화하고, 어려움을 겪는 기업에는 먼저 손을 내미는 능동적인 행정을 구현하겠다.
둘째, 데이터라는 주춧돌을 놓는다. 주춧돌은 집 전체의 무게를 묵묵히 떠받친다. 마찬가지로 AI의 성능과 신뢰성은 결국 데이터의 양과 품질에서 나온다. 관세청이 축적해 온 방대한 데이터를 단순 보관 자산이 아닌, 정책을 뒷받침하는 '전략 자산'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작년에 신설한 '데이터담당관'을 중심으로 데이터 품질과 연계 체계를 정비하고, 기존 정보를 기계가 읽기 쉬운(Machine Readable) 형태로 전환할 계획이다. 분산돼 있던 정보를 유기적으로 연계해 현장에서 즉각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셋째, 조직과 사람이라는 대들보를 올린다. 집의 뼈대를 지탱하며 구조 전체를 연결하는 대들보는 바로 관세청의 구성원들이다. AI 전환은 소수 전문가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조직 전체의 문화여야 한다. 직원들이 AI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하며, 조직 역시 새로운 방식의 업무와 의사결정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야 한다. 관세청은 작년 AI 확산을 주도할 '인공지능혁신팀'을 신설했고, AI 역량과 직무역량을 모두 갖춘 융합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새로운 교육과정을 운영할 예정이다. 특히 올해는 정보화 담당 부서, 업무 담당 부서, 일선 세관 공무원이 함께 참여하는 'AI 관세행정 추진단'을 구성해 구성원들이 직접 정보화전략계획과 AI 과제 추진을 주도하는 체계를 마련하고자 한다.
넷째, 데이터 개방으로 혁신의 창을 뚫는다. 창문은 집 안팎을 잇고 공기를 순환시키는 통로다. 창이 닫혀 있으면 공기는 정체되고, 집은 결국 스스로를 낡게 만든다. 관세행정의 혁신도 내부에만 머물러서는 완성될 수 없다. 관세청이 축적해 온 통관, 물류, 무역 데이터는 민간의 혁신을 촉발할 수 있는 주요 자산이다. 개인정보와 기업 비밀은 엄격히 보호하되, 민간에서 AI로 활용 가능한 데이터는 개방을 확대해 새로운 서비스와 해법이 싹틀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 행정이 모든 답을 제시하기보다, 데이터 개방을 통해 민간의 창의와 기술이 관세행정 혁신으로 이어지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관세행정 AI 전환의 중요한 방향이다.
마지막으로, 신뢰와 책임이라는 지붕을 덮는다. 비바람을 막아주는 지붕이 있어야 비로소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 수 있다. AI가 판단을 돕더라도 최종 결정과 책임은 사람이 진다는 원칙, 기술이 발전할수록 행정은 더 투명해야 한다는 원칙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지붕과 같다. 국민의 권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대해서는 공정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AI 모델 개발 과정부터 심도 있는 검토를 거칠 것이며, AI의 판단 근거를 확인하고 검증하는 절차를 제도적으로 갖춰 나갈 계획이다. 공정성과 투명성이 뒷받침될 때 우리 국민과 기업의 권익은 더욱 두텁게 보호될 것이다.
설계도 한 장만으로 당장 집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기초를 다지고 뼈대를 세우는 과정은 때로 더디고 고될 것이다. 하지만 관세청은 화려한 외관보다 보이지 않는 기초를 단단히 다지는 정공법을 택했다. 기술에 앞서 기준을 세우고, 속도보다 신뢰를 선택하며, 외형이 아닌 구조를 바꾸는 전환을 이어가겠다. 이 노력이 국민의 일상을 더 안전하게 지키고, 더 많은 기회가 공정하게 이어지는 사회로 나아가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끝에서 국민주권정부의 가치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튼튼한 보금자리가 완성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명구 관세청장 mklee9@korea.kr
〈필자〉 경남 밀양 출신으로 밀양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또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영국 버밍엄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공직은 제36회 행정고시를 통해 첫 발을 내디뎠다. 관세청 대구본부세관장, 서울본부세관장, 부산본부세관장 등 전국 주요 세관에서 경험을 쌓았다. 세계관세기구(WCO) 사무국 파견을 통해 국제적 감각도 갖췄다. 2023년 관세청 차장으로 임명돼 지난해 7월 제34대 관세청장에 이름을 올렸다. 조직 내에서 실무와 이론을 겸비한 정통 공직자와 국제통으로 평가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