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전 군복무 시절 필자는 서울 지역 예비군의 무기를 관리하는 책임 장교를 맡은 적이 있다. 그 당시 가장 난감했던 일은 전국에서 습득된 무기가 과연 관할 지역 예비군의 것인지를 확인해 주는 절차였다. 총기 대장이 있지만 당시 형편상 먹지(紙)를 대고 여러 사람이 서로 다른 필체로 약 10자리의 총기 번호를 기록한 게 전부였다.
더욱이 오후에 총기를 보내 놓고 다음날 아침까지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수십만 개, 그것도 잘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불규칙하게 쓰인 총기 번호를 하룻밤 사이에 확인한다는 일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뢰하는 부서나 확인해 주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었다. 확인 절차를 거의 포기한 채 ‘사실이 아니면 모든 책임을 진다’라는 문구를 넣어 확인서를 상급 기관에 제출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모한 일이었다.
30여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국가 프로젝트의 평가 과정을 보면서 옛 군시절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억원의 연구비와 개발비를 집행하기 위해 제안서를 받아 평가하는 과정에서 그때의 무모함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평상시 경험이 없거나 관심이 많지 않은 분야의 제안서를 평가 현장에서 받아 보고 10∼20분의 발표를 들은 뒤 결정해야 하는 게 예비군의 총기 대장 확인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대부분 제안자에게 유리하도록 과대 포장해 발표하므로 이를 잘 구분해 옥석(玉石)을 가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한 번 회의에서 다뤄지는 사안이 수십 건에 달하는 게 현실이다 보니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 특별한 동기 부여, 체계적인 관리 없이 유능한 평가위원을 초빙하는 것도 어려운 실정이다. 단계 평가가 제대로 연계되지 않아 선정 결과에 크게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점도 문제다.
효율적으로 국가 예산이 쓰여야만 진정한 국가 기술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이제는 국책 프로젝트의 규모상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평가시스템을 범국가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국가 프로젝트의 평가를 책임지고 수행하고 있는 기관 및 절차, 평가 참여자와 관련해 몇 가지 제안하고 싶다.
첫째, 평가기관의 거듭나기를 촉구한다. 국가 프로젝트 규모가 작았던 70∼80년대의 평가 방식을 그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의 양적 팽창은 물론이고 질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인원으로 운영하는 일은 지양(止揚)돼야 한다.
평가기관의 관계자도 뒤탈이나 민원의 소지가 발생하지 않도록 일반 행정가가 아닌 그 분야의 실질 전문가가 되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줘야 한다.
둘째, 평가위원 운용체계의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선정부터 결과까지 책임 있는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일회성에 그치지 말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며 그들에게 반대급부적인 혜택이 돌아가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셋째, 선정된 과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큰 간섭 없이 연구개발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자유를 보장하고, 결과에 대해서는 철저히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넷째, 평가기관에 평가 업무뿐 아니라 시장 변화를 예측하고 분석할 수 있는 정책 부서를 둬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국민 정서상 사람이나 프로젝트를 철저히 평가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다. 그러나 진정한 세계 일류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정확한 평가문화가 자리잡아야 한다. 이제는 세계와 경쟁하는 시대다.
◆박영필 연세대학교 기계공학부 교수 park2814@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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