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은 만화 속의 캐릭터다. 만화 속에서 현실 속으로 망토를 펄럭이며 날아온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 1, 2편은 어둡고 우울한 회색빛의 도시 고담시를 배경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끊임없이 질문하는 영웅을 창조했다.
배트맨은 이중인간이다. 낮에는 부유한 사업가 브루스 웨인, 밤에는 악을 소탕하는 도시의 영웅.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고뇌한다. 악을 소탕하는 그 자체에 쾌감을 느끼며 영웅의 위치에 자만감을 가질 수도 있다.
팀 버튼의 ‘배트맨’이 그 뒤를 이은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과 로빈’ ‘배트맨 포에버’ 시리즈의 배트맨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바로 자신의 정체성에 질문을 던지며 존재론적 고뇌를 하는 현대인의 초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엘 슈마허는 화려한 테크닉에 시선을 집중시키려고 한다. 고담시의 장식적 요소, 배트카의 초현대적 디자인, 그리고 악당들의 화려한 캐릭터는 배트맨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질 기회도 없이 사건들 속으로 빨려들게 한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속의 영웅적 캐릭터로 변신시킨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과 달리, 배트맨의 탄생 신화를 탐구하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비긴즈’는 팀 버튼의 고뇌하는 이중적 자아에 훨씬 더 가까운 배트맨을 보여준다.
부인이 살해된 후 범인을 뒤 쫒는 단기기억상실증 환자처럼, 토막 난 시간의 역순으로 편집된 독특한 구성의 ‘메멘토’와 안개 속에서 자신의 동료를 살인범으로 오인하고 총을 쏜 경찰의 내면을 탐구한 ‘인썸니아’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미 신화가 된 배트맨을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 고뇌한다.
부모가 죽은 후 브루스 웨인은 분노와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그가 부모의 복수를 위해 어떻게 증오심을 키워갔는지, 그의 외면적 나약함 속에서 이글거리는 내면의 분노가 어떻게 개인의 사적 복수를 떠나 도시를 구원하는 공적 정의를 수행하는지, 그 출발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배트맨 비긴즈’는 배트맨이라는 캐릭터를 결정짓는 중요한 작품이다.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던 남자에게 부모가 길거리에서 살해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어린 브루스 웨인은 범죄자들의 소굴 속으로 직접 뛰어들며 그들의 습성을 터득한다. 브루스 웨인에게 정신적 육체적 수련법을 가르쳐 준 스승은 듀커드(리암 니슨 분). 그는 동양계 무술 고수인 라스 알굴(켄 와타나베 분)이 이끄는 ‘어둠의 사도들’의 멤버였다.
악을 소탕하는 그룹 ‘어둠의 사도들’은 브루스 웨인과 지향점이 비슷한 것 같지만, 악을 악으로 응징하는 그들의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브루스 웨인은 고담시로 돌아온다.
브루스는 가문의 충성스러운 집사 알프레드의 도움을 받아 웨인 가문을 재건하려고 한다. 그리고 어두워지면 배트맨으로 변신해 악을 소탕하기 시작한다.
검사보인 소꿉친구 레이첼(케이티 홈즈 분)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그녀에게 자신의 이중성을 밝힐 수는 없다. 아버지가 남긴 웨인엔터프라이즈는 전문 경영인이 다른 속셈을 가지고 운영하고 있다. 브루스 웨인은 알프레드 집사와 기업 전문가 폭스(모건 프리먼 분)의 도움으로 다시 웨인 그룹을 재건한다.
‘배트맨 비긴즈’의 내러티브 밑에는 다양한 갈등이 숨겨져 있다. 가령 브루스와 고담시로 찾아온 스승 듀커드의 이념적 대립이나, 브루스와 집사 알프레드의 갈등, 그리고 브루스와 레이첼의 어긋남이 그것이다. 집사 알프레드는 브루스의 아버지가 강조했던 명예를 소중이하라고 충고한다. 명예는 배트맨의 생명이다.
이것은 배트맨이 헐크나 슈퍼맨 같은 다른 초인간적 캐릭터와 다른 점이다. 악을 소탕하는 정의로운 행동이지만, 고전적 대의명분을 중요시하고 자존심을 지키려는 배트맨의 행동은 도덕적 가치의 수호와도 맞닿아 있다. 그러면서도 배트맨은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한다. 확신이 아니라 존재에 대해 갈등하는 배트맨, 그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영화 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 s2jazz@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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