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오리나가 결국 낙마했다. 미 IT업계의 아이콘(상징)인 휴렛패커드(HP)를 지난 5년간 이끌어 온 그녀는 그동안 빌 게이츠 못지않은 인기를 누려왔다. 그녀의 높은 인기에는 여성의 몸으로 거대 IT기업을 이끌고 있다는 점이 분명히 한몫했다. 여성 차별이 비교적 적다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조차 여성이 연매출 800억달러에 육박하는 매머드 기업을 이끈다는 점에서 사소한 것 하나라도 충분히 화젯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녀에게 따라 붙는 수식어도 화려하고 다양하다. 전 영국 수상인 대처 여사를 빗댄 ‘IT 업계 철의 여인’이나 ‘실리콘밸리 신데렐라’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경영인’ 등은 모두 그녀를 위한(?) 말이다. 하지만 이 철의 여인도 결국 시장의 힘을 이기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시장에선 그동안 HP 몸값을 높이고 효자 사업인 프린터 부문을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골칫덩어리인 PC 부문을 분사하라고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그러나 피오리나는 그럴 때마다 “디지털 시대는 이들이 서로 결합, 시너지 효과를 내야 한다”며 강력히 반대해 왔다.
미국의 한 언론이 최근 처음으로 피오리나와 HP 이사회 간 불화설을 제기하며 낙마 가능성을 제기할 때도 그녀는 ‘오보’라면서 완강히 부인했다. 불과 2주 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도 “이사회와 마찰설은 과장됐다”며 “경영권 악화나 CEO 사임 같은 것은 절대 없다”고 시치미를 뗐다. 하지만 이 말은 10여일 만에 결국 거짓으로 판명되고 말았다.
피오리나는 PC 부문을 강화하기 위해 지난 2002년 컴팩을 인수했다. 하지만 기대한 만큼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계속 델에 의해 고배를 마셨다. 서버 부문에서도 IBM에 밀리면서 입지가 줄어들었다. 설상가상으로 피오리나가 CEO를 맡은 기간 HP 주가는 50%나 떨어졌다. 시장의 압력에 실적 부진이 겹친 그녀는 결국 이사회 압력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가는 곳마다 언론의 플래시 사례를 받았던 피오리나의 낙마는 ‘실적 앞에 장사 없다’는 기업의 냉엄한 세계를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국제기획부·방은주차장, ejba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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