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중고등학교에서는 학교 수업시간이나 시험중에 계산기를 사용하도록 허용한다. 이 같은 현상은 단순 계산이나 간단한 알고리듬의 반복적인 수행보다는 교과과정의 기본 원리, 핵심 개념의 이해 및 응용력 배양에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의 경우 공식 교과과정에 계산기 사용을 일절 금함으로써 학생들이 창의력과 응용력 함양에 할애해야 할 시간을 기계적인 계산 수행에 소모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가 많은 산업분야의 핵심 기반기술이나 공장 기본설계기술에서 선진국에 뒤지는 것은 이런 교육 패턴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기술의 연구 개발 및 공장 조업환경에서 보다 효율적인 첨단 기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 및 적응 훈련에 대한 수동적인 자세 때문에 고전적이고 단순한 기법에 의존함으로써 선진국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80년대 후반 여천 석유화학단지 내 회사의 BTX(Benzene-Toluene-Xylene) 공장 모사시스템 구성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당시 적절한 수치 해석용 툴을 찾을 수가 없어 상당한 시간을 들여 일련의 비선형 및 미분 방정식들을 해결하기 위해 C언어와 개발툴 킷을 이용해 코드를 일일이 작성해야 했다. 결국 전체 소프트웨어 시스템 개발시간 중 80% 이상을 단순 수치해석코드 및 GUI 구성에 투입하는 비능률적인 선례를 남겼다.
수치해석 기법이나 알고리듬 설계, 시뮬레이션 및 그래픽유저인터페이스(GUI) 구성기법들은 화학공학 분야뿐 아니라 대부분의 산업 부문에서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기법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각각의 기능을 아우르는 표준화된 테크니컬 컴퓨팅 환경은 없는 것일까.
과거 테크니컬 컴퓨팅 환경에서는 C, C++, 또는 포트란 등을 널리 사용해 왔다. 하지만 이들 프로그래밍 언어는 유연성이나 호환성은 뛰어난 반면 숙지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다른 개발자가 작성한 프로그램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워 공유 및 재사용이 어렵다는 단점도 있다. 과거처럼 비교적 소규모의 프로젝트가 일반화된 산업 환경에서는 이들 언어를 이용, 소수의 개발자들이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구성하는 작업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반 산업분야의 시스템이 복잡해지고 규모가 커짐은 물론 새로운 첨단 산업분야가 대두되고 있는 최근 개발 추세는 여러 그룹들 간 협업을 필수적으로 요구하고 있어 적절한 표준 개발도구의 사용 및 작업 결과의 공유 기능이 중요한 사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최근 국내 공과대학의 교육 환경은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공학 교육이 조직적인 계산방법의 활용이나 도표 및 그래프 작성 등에 많은 시간과 비중을 두었다면 80년대 후반부터 널리 보급돼온 매트랩(MATLAB), 매스매티카(Mathmatica) 등의 테크니컬 컴퓨팅 소프트웨어의 활용으로 보다 근본적인 공학원리의 이해와 실제 산업분야에의 적용능력 고양에 집중하고 있다.
해외 선진기업들도 일찍이 이러한 첨단 테크니컬 컴퓨팅 환경을 도입, 기술개발 기간의 단축 및 소요비용 절감 효과를 얻고 있다. 미국의 나사(NASA)를 비롯해 록히드마틴, 인텔, 도요타 등의 초일류 기업들은 테크니컬 컴퓨팅 환경의 도입으로 기술개발 기간을 30~60%, 기술개발 소요비용을 20~50% 정도 절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국내 기업들의 테크니컬 컴퓨팅 도입활용 실태는 극히 미미한 실정이다.
필자는 국내 기업들의 경영층에서 테크니컬 컴퓨팅 환경 구축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표준화된 테크니컬 컴퓨팅 환경의 구축이 소규모의 투자로 신속하게 연구개발(R&D) 효율성 향상을 끌어낼 수 있는 매력적인 솔루션이기 때문이다.
최근 대학에서 널리 정착돼 표준화된 테크니컬 컴퓨팅 환경에서 교육받은 엔지니어들이 산업 현장에서 실제 활용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 산업계의 기술 수준은 바로 한 단계 더 높아질 뿐 아니라 새로운 소프트웨어 산업의 창출로 부가적인 이익을 한껏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 여영구 교수 ykyeo@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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