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가 마치 밀물처럼 밀려오고 있다. 불과 수년 전만해도 미래기술, 잠재 유망 기술로만 여겨졌던 ‘NT(Nano Technology)’가 빠르게 상용화 및 산업화의 길로 접어들며 꿈을 현실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21세기 꿈의 기술 NT는 어느새 세계 경제의 새로운 성장엔진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NT는 무엇보다 기술적 파급효과가 크다. 정보통신 분야는 물론 자동차, 기계, 바이오, 환경, 부품·소재 등 모든 산업의 미래 핵심 요소기술이 바로 NT다. 그런가 하면 IT, BT 등과 결합돼 마치 세포가 분열하듯 새로운 융합기술을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도 앞으로 NT 헤게모니를 잃는다면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은 요원할 것이란 우려섞인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그만큼 NT의 영향력은 지금의 IT 못지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우리가 때늦은 감이 있지만 NT를 전략 육성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 본지는 NT강국 구현을 위한 정책적 대안 제시와 NT산업 육성 및 저변확대를 위해 ‘NT강국을 만들자’란 연중기획시리즈를 마련했다.
◇10억분의 1m의 마력=NT는 10억분 1m의 초미세구조를 갖는 소재, 소자, 시스템을 만드는 기술로 정의된다. 표면적으로 마이크로기술의 다음 버전. 1㎛가 1백만의 1m이므로 이보다 1000분의 1정도 미세한 구조를 다루는 기술인 셈. 그러나 NT와 마이크로기술은 개념이 다르다. 물질을 원자나 분자단위로 조작해 나노(㎚)단위로 처리하면 마이크로구조에서 불가능했던 새로운 전기적, 자기적, 광학적 특성이 나온다.
메모리 반도체의 예를 보자. 메모리는 약 10년 후면 지금보다 1000배 이상의 용량을 필요로 하지만, 물리적으로 용량을 높이는 것이 5∼10년 후면 한계에 달한다. 테라급나노소자개발사업단 이조원 단장은 “반도체집적도를 높이는 데 태생적 한계가 보인다”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NT밖에 없다”고 잘라 말한다.
구조재료분야도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금속이든 비금속이든 물질을 나노단위에서 조작하면 경도가 획기적으로 높아져 보다 가볍고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 나노소재개발사업단 서상희 단장은 “나노소재는 인공장기, 진단장치 등 불가능으로 여겨졌던 소재 영역까지 응용범위가 넓어지고 있다”며 “앞으로 우리 삶의 질을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나노소재는 또 금과 은을 나노단위에서 처리, 물성이 대폭 높아져 세탁기, 냉장고, 공기청정기 등 가전제품과 화장품 등에 폭넓게 응용되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언제 어디서나 접속이 가능, 정보통신의 시공을 초월한 유비쿼터스컴퓨팅의 핵심도 NT다. 전문가들은 “향후 2010년대 중반이면 NT 관련 세계 시장 규모가 수조달러를 돌파하고 200만명 이상의 새로운 고용을 창출할 것”이라고 추산한다.
◇헤게모니를 잡아라=미국 NSF(과학재단)는 최근 2015년경 NT의 경제적 가치를 1조달러로 예상했다. 다소 성급한 전망이지만, IT가 20세기 세계 각국의 국운을 좌우했다면, 21세기는 분명 NT에 의해 그 나라의 위상과 경제규모가 달라질 것이 확실하다. IT가 세상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선진국들이 NT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달 3일, 부시 미 대통령은 ‘나노연구법안’에 전격 서명했다. 그러자 미국은 물론 전세계가 들끓었다. 향후 4년간 미 행정부가 약 4조원(37억달러)에 달하는 연구비를 NT 분야에 집중 투입하겠다는 것이 이 법의 핵심. 더욱 주목을 끈 것은 법제정 과정이 이례적으로 속전속결 처리됐다는 사실. 그만큼 NT개발의 긴박함을 증명한 것. 국방(DOD)·에너지(DOE)·NSF·NASA 등을 중심으로 현재 약 1조원 가량을 NT에 투입하고 있는 미국으로선 날개를 단 셈이다.
일본은 더욱 적극적이어서 NT에 국가의 미래를 걸고 있다. 자동차, 조선, 철강 등 전통적으로 중공업과 제조업이 강한 일본으로선 NT를 통해 80년대 경제대국의 신화를 재연하겠다는 전략이다. 특히 90년대 이후 IT분야에서 미국은 물론 한국에마저 주도권을 빼앗긴 일본으로선 NT만이 살길이라고 보고 과감한 투자를 계속하고 있다. 이미 지난 2002년에 ‘경단련’이 주축이 돼 기존 ‘N플랜21’을 확대한 ‘N-플랜2002’란 NT 개발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있으며 투자규모도 매년 10억달러에 이르며 미국을 압도하고 있다.
유럽도 별반 다르지 않다. 우선 영국이 산업화뿐 아니라 산업화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I2 Nanotech Centre’와 ‘IoN’을 결성, 학계 연구개발을 산업계로 전환하는 방안을 추진중이며, 전통적 기술강국 독일도 NT개발 및 상용화에 가속도가 붙었다. 기초과학면에선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중국역시 NT개발을 통해 미래 원천 기술을 확보, ‘거대시장이자 생산기지’에 이어 기술대국의 꿈을 감추지 않고 있다.
기업 레벨에서도 NT육성이 활발하다. 세계 1위 반도체 기업 인텔과 소프트웨어 기업 마이크로소프트, 세계적 기업으로 떠오른 삼성전자 등 업종을 망라해 국내외 유수의 기업들이 매년 천문학적 비용을 NT에 쏟아부으며 그야말로 나노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미 올해부터 나노반도체 본격적인 상용화시대로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아직 늦지 않았다=NT에 관한한 우리나라는 아직 초보 단계다. IT강국이지만, NT는 선진국을 100으로 볼 때 25 수준에 불과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냉정한 평가다. 그나마도 ‘팹(상용화)’이 아닌 ‘랩(연구)’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렇게 가다간 반도체, LCD 등 세계 일등상품마저 위태로와질 수 있다는 우려가 높다.
그러나, 우리도 결코 늦지 않았다. 나노기술개발촉진법이 제정돼 나노육성을 위한 법적 근거가 마련됐으며 NT 육성을 위한 장기비전도 나와 있다. 지난해 4월 과기부를 축으로 9개부처가 힘을 합쳐 만든 ‘나노기술종합발전계획’이 그것이다. 정부는 2005년까지 핵심 인프라를 구축, 2010년경엔 세계 5대 NT강국으로 올라선다는 목표다. R&D투자만도 2010년까지 총 1조4850억원이 책정된 상태다.
인프라도 갈수록 견고해지고 있다. 2002년 말 완성된 국가기술지도(NTRM)에 나노분야 R&D의 정책 방향이 수립됐으며, 나노종합팹센터·나노특화팹센터 등 핵심 인프라 구축이 한창이다. IT, BT 등 다른 요소기술과 접목된 융합기술 프로젝트로 지난해 공식 출범했다. 여기에 범 NT연구계의 구심점인 ‘나노기술연구협의회’와 산업체의 대표창구인 나노산업기술연구조합이 만들어졌다. 국제 나노협력사업도 활기를 띠고 있다.
무엇보다 NT 애플리케이션 산업이 잘 발달한 것이 ‘NT-코리아’의 미래를 밝게 해주는 부분이다. 임한조 나노기술연구협의회장(아주대 교수)은 “우리나라는 반도체·LCD·2차전지·자동차 산업이 발달해 NT육성이 보다 유리할 것”이라며 “NT에 국가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범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 이를 적극 육성한다면 IT에 이어 ‘NT신화’ 창조도 충분한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중배 기자 jblee@etnews.co.kr, 손재권기자 gjack@etnews.co.kr>
◆ 나노기술은
나노(Nano)는 난쟁이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나노스(nanos)’에서 유래했다. 1 나노미터(㎚)는 10억분 1m다. 이는 머리카락 굵기의 8∼10만분의 1, 수소원자 10개를 나란히 늘어놓은 정도의 크기다.
나노기술(Nano Technology)은 물질을 원자나 분자 단위로 조작해 대략 1∼100㎚ 크기를 갖는 미세 구조를 만들어 새로운 특성과 기능을 갖는 소재, 소자, 시스템을 창출해내는 것을 이른다. 물질이 나노단위로 크기가 줄어들면 양자물리 법칙이 적용돼 전통적 특성이 바뀐다. 이 원리를 인간이 유리한 방향으로 응용하는 것이 바로 NT의 기본 개념이다.
나노로 제조하는 방식은 깎아서 작게 만드는 ‘하향식(Top-Down)’ 방식과 원자나 분자 하나하나를 쌓아서 크게 만들어 가는 ‘상향식(Bottom-up)’으로 나뉜다. 하향식은 반도체 제조공정 중 노광(리소그라피)처럼 물리학이나 공학에서 응용되며 상향식은 생물체가 자기 성장하듯 하는 방식으로 생물학자나 화학자들이 응용하고 있다.
나노 기술은 독자적으로 쓰이기보다는 의료건강, 정보통신, 국가안보, 교육, 신소재, 환경 등에 광범위하게 응용돼 빛을 발휘한다. 분자소자, 나노튜브소자, DNA칩, 단백질칩, 신약, 형광체 등 새로운 영역도 늘어나고 있다. 기존 강철보다 강도가 1000배 이상 강한 탄소나노튜브 등 신소재들도 나노기술을 근간으로 한다.
◆ 기고 - 미래 국가 기술경쟁력 좌우
임한조 나노기술연구협의회장 hanjolim@ajou.ac.kr
통상적으로 NT는 나노미터(nm=10-9m) 이하의 자연현상을 다루는 과학 기술이다. 사실 NT는 갑자기 탄생한 기술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물리학, 화학, 전자공학, 재료공학 등에서 독립적으로 연구돼왔다. 그러나 NT는 최근들어 새로운 산업의 원천으로 국가의 미래 기술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기술로 부상했다.
앞으로 미래 원천 기술의 상당부분은 나노기술에 근거할 것이 자명하다. 따라서 기술혁신체계 구축과 하이테크로의 산업구조 개편을 위해서도 NT 육성은 이제 절대정명의 시대적 과제다. 그러나 ‘미래원천기술의 1%만 산업기술로 성장할 수 있어도 성공적’이라는 이야기를 유념할 필요가 있다.
즉, 현재 연구중인 많은 나노기술은 실용화에 실패할 것이다. 이 실패를 견뎌 내고 살아남은 기술만이 산업화에 성공할 것이다. 첨단기술일수록 리스크가 큰 리스크가 따르기 마련이다. 리스크가 클수록 리턴(수확)이 크다. 그러나 아무리 수확이 크다고 해도 이처럼 위험성이 높은(high risk) 곳에 투자하는 일은 말처럼 그리 쉽지 않다.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연구개발의 선택과 집중도 요구된다. 우리나라는 경제규모가 작기 때문에 양적 투자규모로 선진국을 따라잡기 어렵다. 현재 NT분야의 국가 R&D 규모 역시 미국과 일본의 6∼8분의 1에 불과하다. 때문에 우리가 보다 잘 할 수 있는, 우리가 강점을 갖고 있는 분야를 우선적으로 개발하고 상용화를 추진해야 한다.
본격적인 산업 육성에 앞서 인프라를 확충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미래 경쟁력은 인프라의 질에 따라 달라진다. 우선 현실적으로 NT연구에 필요한 고가 장비를 확충하는 일이 시급하다. 대학이나 산업체에서 고가 장비를 구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우선 각 분야별로 집중적으로 연구실험을 할 수 있는 공용 인프라 구축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
산·학·연이 연계, 개발하는 것도 필요하다. 대학은 기초연구를 맡고 연구소와 산업체는 상용화를 전제로한 산업기술 개발에 매진해야 한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산업화를 강조하는 것도 곤란하다. NT는 원천적으로 미래를 위한 과학기술 문화이며 미래원천기술이다. 산업화를 너무 강조하면 기초 핵심 인력 양성에 어려움이 따른다. 대표적인 예가 나노바이오(NBT) 분야다. NBT는 NT의 3분의 1을 차지하지만, 우리나라는 이 분야의 전문인력이 크게 부족하다.
나노기술은 인류의 삶의 질은 물론 과학기술문화를 획기적으로 변하게 만들 것이다. 나노기술은 앞으로 우리 생활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정부는 문화육성 차원에서도 나노기술을 육성해야 한다. 10억분의 1m에 초미세 나노기술에 의해 이제 세상은 산업혁명과 정보혁명에 버금가는 새로운 혁명의 기로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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