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포럼]역사가 소멸된 시대

 카(E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대학생 필독서 중의 필독서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책을 읽은 대학생들 모두가 그의 정의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대화”라는 명구를 몸으로 이해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역사시대’이며 그 이전 시대는 ‘선사시대’다. 선사시대는 역사가 없었던 시대 혹은 역사가 있기 이전 시대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역사시대를 문명시대라고 하며 역사가 없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할까. 필자는 얼마 전에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유적을 관광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규모와 당시 자야바르만 2세가 세운 앙코르 왕조의 웅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사실은 앙코르 왕조가 정확히 언제 어떻게 세워졌으며 어떻게 멸망했고 그 후예가 오늘날의 크메르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등에 대한 아무런 역사적 기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저 모든 것은 거대한 사원의 벽에 부조된 신화와 석수쟁이들의 얘기들로부터 짐작될 뿐이었다. 즉 오늘날의 크메르인들은 과거의 그들과 아무런 대화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과거인과 현재인들이 서로 대화할 수 있는 매체, 곧 문자를 통해서 창조된다. 그러므로 문자가 없으면 역사는 없는 것이며,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도 문자의 있고 없음에 의해 구분된다. 이제 문자 소멸의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디지털코드에 의해 이야기는 문자로만 들려지는 것이 아니라 멀티미디어로 들려지게 되었다. 이 새로운 디지털코드는 직지심경에 비하면 그 저장 능력, 원본 보존 능력, 대량 복사 능력 면에서 비교를 불허한다. 어렵지만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함축할 수 있었던 중국의 한자를 어렵게 배울 필요도 없고,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다는 한글마저도 배울 필요도 없이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얘기를 동영상 그대로 담아서 정말 ‘사실 그대로’ 수천만년 동안 오래오래 또 수천만의 사람들에게 온 지구 방방곡곡에 널리널리, 그리고 심지어는 우주의 모든 곳에까지 순식간에 들려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역사를 쓸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정말 그럴까. 아직은 잘 모른다. 독일의 사회학자 플루서는 이러한 시대를 일러 후기역사시대(post-history)라고 명명하고 있지만 우리는 정확히 그 시대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일상 생활을 규율할지 모르며,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들과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른다. 단지 우리는 우리의 어린 자녀들이 사이버세상에서 노는 모습을 보면서 놀랄 뿐이다.

 이미 우리의 아이들은 역사가 소멸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부모의 얘기를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고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이 부모도 모르는 후레자식들이 되어간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걱정을 말라고 한다. 금방 컴퓨터를 열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으며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금방 알 수 있으며, 자기들에게 필요한 최적의 해답을 찾아내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고 호언한다. 아무리 아빠엄마가 할머니할아버지를 미화해도 믿지 않을 것이고, 아무리 잘 사는 이웃집 아이에게도 이내 그 집의 내막을 알고서는 기죽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내가 남을 훤히 알 듯이 내 역시 남에게 훤히 들춰질 터이니 거짓말은 하지도 못할 것이다. 말 그대로 역사의 왜곡이라는 있을 수 없게 된다.

 분명히 디지털세상은 역사를 소멸시키는 세상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러한 세상이 신기하고 기다려지기보다는 오히려 두려울 뿐이고,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역사소멸의 디지털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곰곰이 따져볼 현자도 없어서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제라도 우리는 역사의 소멸 이후를 심각하게 준비해야 한다.

◆천세영 충남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sychun@c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