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가 산업의 영역을 넘어 사회 전반에 깊숙히 침투 하면서 정치·사회·문화 등 다방면에걸쳐 새로운 풍속도를 낳고 있다. 외신으로부터 ‘세계 첫 인터넷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출범도 인터넷 등 IT 덕분에 가능했다.
본지는 창간 21주년을 기념, IT가 사회 각 분야에 미치는 영향을 조명하기 위해 이주헌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원장과 ‘정보화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사이버스페이스 분야 세계적 석학 마뉴엘 카스텔(Manuel Castells) 미 남가주대학(USC) 석좌교수와 온라인 대담을 마련했다. 두 사람은 대화에 앞서 기술과 사회가 서로 주고 받는 관계이기 때문에 사회적 변혁을 위한 기술 활용에 보다 적극적 관심이 필요하다는데 뜻을 같이 했다.
△이주헌 원장(이하 이 원장):지상을 통해 온라인으로 대담을 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카스텔 교수께서 행하신 정보통신망의 확장과 세계화 진전에 따른 경제·사회·문화적 변동에 대한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분석연구는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동아시아를 포함해 북미·중남미· 유럽 등 세계의 광범위한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과 자료수집에 근거한 카스텔 교수의 통찰은 이때문에 21세기 정보화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는 한국에도 많은 것을 시사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뉴엘 카스텔 교수(이하 카스텔 교수):우선 한국의 독자들에게 저의 견해를 피력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 원장과 전자신문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원장:먼저 국제적 쟁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9·11 테러 이후 세계정치 및 세계문화가 패러다임 변화를 경험하면서 문화권간 충돌에 대한 논의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인터넷이 국경을 초월해 아이디어와 지식을 공유하는 획기적 매체로 각광받고 있는데, 과연 인터넷의 확산이 이념·종교·민족의 다양성이 만든 문화적 장벽을 극복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봅니까.
△카스텔 교수: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은 있는 그대로의 사회를 표현합니다. 현재 문화권간의 갈등은 각국간 이해 부족 때문이 아니라 약소국에 대한 서방 강대국의 정치적·문화적 지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다양한 문화가 진정으로 수용되는 사회적·정치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다른 문화를 서로 배척하는 분위기가 있는 한 인터넷은 권력의 연결망에 대항, 저항의 연결망을 조직하는 수단만이 될 것입니다. 이 경우 인터넷은 이해의 매체가 아니라 투쟁의 매체로 변합니다.
△이 원장:구조화된 문화적 대립을 해소하려는 열망에서 인터넷에 대한 낙관적 기대가 생겨나는 것 같은데 지나친 낙관주의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는 12월에 열릴 ‘정보사회 세계정상회의(WSIS)’에서는 정보격차·시민참여·인터넷 거버넌스 같은 다양한 쟁점이 논의될 예정인데 카스텔 교수께서 보기에 세계 정보사회 발전을 위해 WSI가 논의해야 할 중요 사안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카스텔 교수:주요 선진국의 기업과 정부가 제3세계의 정보통신망 인프라와 시스템 구축 지원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또 3세계의 교육체계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기술적 마샬 플랜’ 추진도 매우 필요하다고 봅니다. 제가 자문단의 일원으로 있는 UN의 정보통신기술특별위원회(TFICT)에서 이에 대한 자세한 계획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만, 주요 선진국들 특히 미국은 세계 정보시대 발전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보다는 테러와의 전쟁에 더 열중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이 원장:세계 공동번영을 추구하는 국제기구 활동에서 주요 선진국들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크게 작용하고 있는 점은 분명 우려스러운 측면입니다. 한국은 동남아시아·중남미·러시아·중국 등을 중심으로 정보격차 해소를 위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데, 한국과 같은 국가들이 국제기구에서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장이 마련돼야 할 것입니다. 교수님은 지난 97년 발간된 ‘정체성의 권력’이라는 저서에서 국민국가의 역할이 약화됨에 따라 소수자 권리·민주주의·여성권리·환경보호 등과 같은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소위 ‘프로젝트 정체성(project identity)’의 중요성이 커질 것이라고 역설한 바 있는데, ‘카피 레프트(Copy Left)’와 같은 사이버공간에서의 새로운 사회운동에 대해서 어떤 전망을 하고 있습니까.
△카스텔 교수: 사이버공간의 사회운동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카피레프트’운동은 단지 그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공개 소스 운동으로 특징지어지는 이러한 운동은 인터넷상에서의 자유로운 혁신적 기술공유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미 리눅스, 아파치 등과 같은 많은 공개 소프트웨어에서 성취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세계 웹 서버의 3분의 2가 공개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IBM이 리눅스를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EU·프랑스·브라질 등이 공적 서비스에 리눅스를 사용하는 것을 고려하게 되면서 이 운동의 승산은 매우 커지고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이용자들의 무지와 수동성을 이용하는 강력한 독점에 매달려 있습니다만, 위험한 공룡에 지나지 않습니다. 통신망의 세계는 혁신을 바탕으로 발전하며 혁신은 자유와 공유를 바탕으로 꽃을 피우게 됩니다.
△이 원장:사이버공간의 발전을 위해서 공개 소스 운동의 활성화되어야 되겠죠. 한국에서도 공개 소스 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 정부차원에서 공개 소프트웨어 이용 확산을 위해 전담기구를 설치하는 등 정책적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또 여러 시민단체도 카피레프트 및 공개 소스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21세기에는 동아시아의 경제가 중요하게 될 것이라고 역설한 바 있는데, 지난 97년 한국의 IMF 금융위기 이후에는 다소 다른 전망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최근에는 어떤 전망을 하고 있습니까.
△카스텔 교수:지난 2000년에 출판된 저의 저서에서 97년 금융위기의 원인과 결과를 자세하게 분석한 바 있습니다. 주요한 변화는 일본이 관료주의와 문화적 보수주의의에 얽매여 네트워크 사회와 정보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경제가 지체되고 사회가 마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이나 중국은 구조조정을 추진해 오늘날 발전의 추진제라고 할 수 있는 통신망 조직과 문화적 창조성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산업화 시대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재벌 문화의 영향 아래 있고 중국은 관료주의적 국가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원장:동아시아 경제의 저력이 쉽게 소진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금융위기 이후 한국사회는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투명성과 합리성을 제고시켜왔고 지적하신대로 아직 구시대의 잔재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변화의 방향은 이미 정해졌기 때문에 낙관적으로 전망해도 좋을 듯합니다.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서 한국의 정보화 전략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한국이 서방 선진국들로부터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카스텔 교수: 초고속통신망을 제외하면 한국이 그렇게 선진화되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한국의 사회·중소기업·행정·교육·구세대 등은 핀란드와 같은 정보통신 선진국의 수준이 되기까지는 아직 요원하다고 봅니다. 한국보다 훨씬 작은 핀란드는 정보통신 기술 활용을 위한 다차원적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한국이 배워야 할 점은 혁신이 추진제라는 사실입니다. 지난 30여년간의 경험을 볼 때 IT 혁신은 주로 해커들에서 나왔습니다. 해커는 인터넷을 방해하는 크래거가 아닙니다. 해커들은 이윤이 아니라 재미를 위해서, 혁신 그 자체의 즐거움을 위해 혁신을 하고 다른 사람들과 자유롭게 혁신을 공유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요인은 실리콘밸리, 핀란드, 인터넷 전체의 발전 등에서 핵심적인 요인이 되어왔습니다. 한국은 과감하게 자유와 탐험을 허용해야 하고 세계의 변화를 이끄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적극 지원해야 할 것입니다.
△이 원장:카스텔 교수께서는 정보통신망의 발전과 세계화의 진전에 따른 사회적·경제적 변동을 거시적 차원에서 주로 분석해 왔는데 최근의 연구 분야는 무엇입니까.
△카스텔 교수:저는 현재 ‘네트워크 사회: 국제적 시각에서’라는 책의 편집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그 핵심적 주제는 정보사회의 모형이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실리콘 밸리 모형은 선구적이긴 해도 다양한 모형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개별 국가, 개별 문화는 스스로의 필요와 문화에 맞도록 인터넷과 IT를 채택하고 있으며 저는 이를 경험적으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또한 인터넷과 통신망의 확산에 따른 공적 부문 및 공공 서비스의 변화를 연구하고 있는데 전자학습, 전자의료, 전자정부가 오늘날 정보사회의 가장 중요한 세 영역이라 하겠습니다.
△이 원장: 국가나 문화에 따라 정보화 모형의 다양하다는 인식에 전적으로 공감을 합니다. 한국의 사례, 특히 현재 활발히 추진 중인 전자정부는 중요한 경험적 자료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좋은 연구결과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정리=방은주 기자 ejbang@etnews.co.kr>
이주헌 원장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을 이끌고 있는 이주헌 원장(49)은 학계와 업계를 두루 거친 한국의 대표적 IT 인사다. 미국 헤티스버그고교와 남미시시피주립대를 거쳐 일리노이공대에서 박사(경영정보) 학위를 받은 그는 78년부터 84년까지 6년간 벨연구소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LG정보통신연구원(구 금성반도체) 연구본부장(84∼85년), 본지 비상임 논설위원(90∼92년), 한국데이터베이스학회 회장(96∼99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 IT정책 특보(2002.12월) 등을 거친 올 4월 KISDI 원장에 임명됐다.
“이제 IT연구는 인문학자들이 해야 합니다”라고 말할 만큼 IT와 사회과학의 접목에 적극 나서고 있는 이 원장은 소프트웨어 공학론(93년·법영사)을 비롯해 다수의 정보관련 책을 저술했다.
카스텔 교수
스페인에서 태생의 마뉴엘 카스텔 교수(61) 교수는 사이버스페이스 분야 ‘가장 중요한 철학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보사회와 인터넷에 대한 그의 연구업적은 90년대 발표된 3부작 ‘정보시대:경제,사회,문화’라는 그의 저서에 고스란히 녹아 들어가 있다.
지난 4월 국내에서도 1부가 발간된 바 있는 이 저서에서 그는 ‘정보시대’에서 80년대 이후 세계가 미증유의 대격변에 놓이게 됐는데 이 대격변을 낳은 것이 바로 새로운 기술이라고 주장하며 ‘정보화 자본주의’의 도래라고 칭했다.
파리대학에서 12년 재직하다 지난 79년 미국 남가주대(USC)로 옮긴 그는 현재 이 대학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저술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정보도시(The Informational City·89년 발간)’를 비롯해 20여권의 정보사회 관련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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