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컴퓨터]특별기고-이상산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슈퍼컴퓨터센터장

세계적으로 20세기를 아날로그산업사회라고 한다면 21세기는 디지털시대로 분류할 수 있겠다. 20세기의 경쟁력은 선발자에 주어졌으며 후발자가 선발자를 추월하기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수십년의 기간이 소요됐다. 따라서 19세기 제국주의시대의 강대국들이 대부분 20세기말까지도 경제강국으로 입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마지막 10년에 불어닥친 디지털혁명은 경쟁력의 주 요소를 창의력에 두고 있으며 디지털의 속성상 경쟁의 대상이 전세계로 확대돼 무한경쟁의 시대가 열렸다. 이제는 선발자로서 보장된 경쟁우위는 순식간에 후발자에 박탈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목도되는 시대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우리나라에도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산업사회에서는 막대한 설비투자와 수십 년에 걸친 노하우의 축적이 있고도 경쟁력의 확보 여부가 불투명했었다면, 이제는 하나의 스타산업이 국가경제 전체를 부양할 수도 있는 환경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적으로 이와 같은 스타산업을 지속적으로 새로 개발해야 국가 경쟁력 유지가 가능하게 된다.

 지금 세계는 디지털시대의 진입을 기회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회를 구축하는 일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은 고성능컴퓨팅법의 제정과 함께 첨단 IT기반 연구개발사업에 매년 1억달러 이상의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 최근에는 ‘사이버 인프라스트럭처’ 프로그램을 통해 과학기술 분야의 디지털 기반시설 구축에 나서고 있다. EU는 제6차 프레임워크 계획에 유럽 전역에 그리드 기술을 기반으로 디지털 기반시설 구축을 위한 막대한 예산투자를 범국가 프로그램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특별히 영국은 지난해 ‘국가 e사이언스센터’를 설립해 과학기술의 연구방법을 기존 아날로그식에서 디지털식으로의 대대적인 전환을 지원하고 있다. 일본도 금세기 들어 ITBL(IT Based Laboratory)이라는 사업을 통해 과학기술 연구개발 방식의 디지털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2002년에는 이와 같은 노력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그리드기술연구소(GTRC)를 신규로 설립했다.

 디지털 방식의 연구는 동일한 투자에 대비해 시간이 흐를수록 기하급수적으로 향상된 도구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기존 실험실(wet lab)에서 수행된 물리적 또는 아날로그 방식과 비교할 때 연구 효율에 있어서 경쟁우위를 제공할 것이 자명하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나라는 정보통신 부문이 국제적으로 상대적 경쟁우위에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서 더욱 차별화된 새로운 기회를 맞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달 21일 과학의날 기념행사에 참석한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는 과학기술 중심사회 구축을 국정 주요과제에 포함한 뜻과 제2의 과학기술입국의 의지를 재확인했다. 또한 참여정부는 과학기술정책에 있어서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과 지역 균형발전이라고 하는 국정원리를 반영할 것을 여러 기회를 통해서 천명했다.

 이번 기회에 참여정부 5년간 과학기술의 중점 정책추진 방향으로 e사이언스 추진을 제안하고 싶다. 과학기술 연구개발 방법론을 기존 아날로그식에서 디지털식으로의 전환, 이를 통해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우월한 과학기술 방법론과 새로운 세대의 창의성이 결합될 때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게 개척해 나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 디지털 연구개발, e사이언스는 경계가 없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동북아 중심국가로 발전하는 것, 지역간 균형발전을 이루고자 하는 참여정부의 국정원리와도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과학기술 분야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슈퍼컴퓨터, 초고속연구망 등 정보통신 자원이나 전자현미경, 입자가속기 등 세계적 과학기술 연구장비의 확보 노력이 우선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각 사업의 연구책임자, 주관기관, 주관부처 간의 협력과 조화보다는 배타적이고 고립돼 있기 때문에 균형잡힌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면도 있어 아쉽다.

 참여정부가 정부투자의 효율적 배분에 역점을 두겠다고 한 것은 시의적절하며 이를 실행함에 있어서 특별히 소외되기 쉬운 공동 활용기반 시설에 대한 적정투자 보장과 이의 지역간 균형배분을 위해 법적인 위상을 갖춘 국가적 조정기구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기존의 국가과학기술위원회나 정보화추진위원회 등에서 이 역할을 추가로 담당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참여정부는 어느 한 계층·지역·분야도 소외되는 일 없이 건전한 상식과 논리에 따라 정책 결정과 집행에 ‘참여’할 수 있는 정부가 되기를 희망한다. 특별히 모든 분야에서 공동으로 활용하는 도구지만 어느 한 분야에서도 투자 제1우선순위에 오르지 않는 연구기반시설에 대한 정부의 지속적인 관심이 과학기술 전반의 창의적 활동에 유언과 무언의 격려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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