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디스플레이 업계의 명가(名家)’로 이름을 날렸던 오리온전기가 창업 37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지난 65년 창업 이후 ‘디스플레이’ 한우물만 파며 성장가도를 질주하던 오리온전기는 대우그룹의 몰락으로 ‘워크아웃’이 결정됐으나 기업회생작업 추진과정에서 느닷없이 지난 13일 ‘상장폐지’가 단행되고 만 것이다.
그간 뼈를 깎는 듯한 내부 구조조정과 채권단의 적극적인 지원속에서 회생의 기대감에 부풀어있던 주주들과 임직원들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상장폐지 결정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말이 있듯이 이 회사 임직원은 별다른 동요없이 ‘명가’ 재건을 위해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암초를 만나 침몰위기에 몰린 ‘오리온호(號)’의 중심에 바로 신임 유완영 사장(58)이 있다. 유 사장은 오리온전기 채권단에 의해 오리온호를 되살릴 최적임자로 평가받아 지난달 22일 신임 대표이사 사장으로 임명됐다. 결과적으로 상장폐지가 결정돼 ‘뒤통수’를 맞은 격이 됐지만 그는 흔들리는 조타수를 다잡고 오리온전기를 바로세우는 힘든 첫발을 내디뎠다.
최악의 상황에 중책을 맡아 어깨가 매우 무거울 것 같은데 유 사장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하고 자신감에 넘친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장폐지로 채권단의 기업회생을 위한 지원에 변수가 생겼지만 그는 오히려 “더 이상 나쁠게 없다”란 말로 대변한다. 어짜피 오리온전기가 처한 상황을 잘 알고 CEO 자리를 결정한 터인데다 상장폐지로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일할 수 있게 돼 부담을 덜었다는 얘기다.
“‘상장폐지에 상관없이 오리온전기를 반드시 회생시키고야 말겠다’는 채권단의 의지가 확고하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한번 해보자’는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는 임직원이 뒤를 받치고 있는데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유 사장은 무엇보다 별다른 동요없이 회사와 그를 믿고 묵묵히 따라주는 임직원의 끈끈한 결속력과 채권단의 변함없는 지원 약속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듯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취임하자마자 헤드쿼터인 구미공장의 곳곳을 들러 직원을 격려하는 일로 업무를 시작했다. 최근엔 직원들과 1대1 미팅을 통해 더 다가가는 데 주력하고 있다. 거의 평생을 정보통신 분야에서 일해온 ‘통신통’으로서 다소 생소한 디스플레이 분야를 일찍 깨우치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 ‘현장밀착 경영’을 소신으로 삼고 있는 경영철학을 몸소 실천하기 위함”이라고 강조한다.
이제는 전문 CEO로 더 유명해졌지만 유 사장은 정통 엔지니어 출신이다. 전기공학도로 출발, 전자-통신-이동통신으로 이어지는 하이테크 기술을 두루 섭렵한 것.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66년 졸업한 그는 ROTC4기로 중위 예편한 뒤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연구원으로 입문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위치한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대학’에서 전자공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클리블랜드일렉트릭일루미네이팅사, 벨텔레폰,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87년엔 한국통신에 입사해 통신시장개방대책전담반장, 사업개발단장, 통신망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95년부터 98년말까지는 LG그룹에 들어가 LG전자, LG정보통신 등에서 굵직굵직한 정보통신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다.
엔지니어인 유 사장이 경영자로 변신한 것은 99년 1월 동원그룹의 IT 대표 계열사인 이스텔시스템즈(구 성미전자)의 대표이사로 선임되면서부터. 그는 이후 성미전자에서 3년 가량 근무하는 동안 2000년에 사상 최대의 실적을 내며 경영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지난해 전세계적인 IT 경기침체 영향으로 인한 실적부진의 책임을 지고 지난 2월 스스로 사표를 던지고 오리온전기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스텔시스템즈에 재직했던 3년의 기간 동안 참으로 많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최상의 상황과 최악의 상황을 모두 맛봤지요. 지난해엔 절반에 가까운 인력을 감축하는 혹독한 구조조정 과정에서 잊지 못할 악역도 맡아 봤습니다.” 유 사장은 “이스텔시스템즈 구조조정의 경험이 오리온전기 정상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렇듯 엔지니어 출신의 전문 경영인인 유 사장이 생각하는 오리온전기의 미래는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 상장폐지가 주주들이나 채권단, 그리고 임직원의 기대를 저버린 치명타였지만 앞으로 오리온전기는 충분히 재상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 유 사장은 “당초 계획보다 1년 앞당긴 오는 2005년에 재상장을 목표를 삼을 만큼 오리온전기의 비전이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물론 올해 오리온전기의 경영실적은 마이너스 성장을 목표로 할 만큼 적자가 불가피할 것이며 내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올해와 내년은 어쩔수 없이 ‘구조조정기’일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매년 적자폭은 큰 폭으로 줄어들 것이며 오는 2004년부터는 흑자로 반전될 것이란 사실입니다.”
유 사장의 이같은 자신감은 오리온전기가 갖고 있는 경쟁력에 기인한다. 사실 오리온전기 69년 TV용 흑백 브라운관을 국채 최초로 생산했으며 93년 6월엔 컬러TV용 20인치 PDP를 국내 첫 개발하는 등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만만찮은 기술력을 자랑한다. 특히 차세대 평판디스플레이인 PDP와 유기EL(OEL) 분야에선 어느 기업 못지 않은 기술력을 축적해 놓았다는 평이다. CRT 분야에서도 아직도 세계 5위권을 유지할 만큼 나름대로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
디스플레이 시장 전망이 매우 밝다는 점도 유 사장이 오리온전기 회생 가능성을 높게 보는 부분이다. 디스플레이산업은 반도체와 함께 우리나라가 세계를 제패한 몇 안되는 업종 중 하나다. 유 사장은 “앞으로도 국내 디스플레이산업은 규모는 물론 기술적인 면에서도 세계시장을 선도해나갈 것”이라며 “브라운관 역시 LCD의 위세에 눌려 한물 간 것 같지만 플랫, 대형 및 HD 등 고부가 제품 위주로 꾸준한 성장세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유 사장이 무엇보다 오리온전기가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임직원의 결속력에 기인한 듯했다. 밖에서 보기엔 모기업 몰락-워크아웃결정-구조조정-상장폐지로 이어진 일련의 악재로 만신창이가 될 법도 하지만 변함없는 애사심을 갖고 있는 직원들이 가장 큰 ‘자산’이라는 것이다. 유 사장은 이를 두고 ‘신기할 정도’란 표현까지 써가며 직원들을 추켜세웠다.
“CEO가 아무리 뛰어나도 직원들의 결속력이 없이는 결코 회사를 살릴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현장경영’ ‘투명경영’ ‘책임경영’ 등 3대 경영과제를 모토로 삼아 실의에 빠진 주주들과 임직원, 나아가 국민에게도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는 오리온전기를 만들도록 전력투구할 것입니다.” 어느새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40대의 정력과 패기를 잃지 않고 있는 유완영 사장의 ‘디스플레이 명가’ 재건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을지, 많은 사람들이 그와 오리온전기를 주목하고 있다.
<이중배기자 jblee@etnews.co.kr>
△44년 전남 광주 출생 △66년 서울대 전기공학과 졸업 △68년 ROTC4기 중위 예편 △68∼70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연구원 △72년 미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대학 전자공학 석사 △75년 동대학 전자공학 박사 △75∼77년 클리블랜드 일렉트릭 일루미네이팅사 엔지니어 △77년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대 객원교수 △77∼79년 미 벨텔레폰 책임연구원 △79∼87년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책임연구원 △86년 국민훈장 △87∼95년 한국통신 임원 △95∼96년 LG전자 전무 △96∼97년 LG그룹 회장실 전무 △98년 LG정보통신 전무 △99∼2002년 3월 이스텔시스템즈 대표이사 △2002년∼현재 오리온전기 대표이사 사장
많이 본 뉴스
-
1
테슬라, 중국산 '뉴 모델 Y' 2분기 韓 출시…1200만원 가격 인상
-
2
필옵틱스, 유리기판 '싱귤레이션' 장비 1호기 출하
-
3
'과기정통AI부' 설립, 부총리급 부처 격상 추진된다
-
4
'전고체 시동' 엠플러스, LG엔솔에 패키징 장비 공급
-
5
모바일 주민등록증 전국 발급 개시…디지털 신분증 시대 도약
-
6
은행 성과급 잔치 이유있네...작년 은행 순이익 22.4조 '역대 최대'
-
7
두산에너빌리티, 사우디서 또 잭팟... 3월에만 3조원 수주
-
8
구형 갤럭시도 삼성 '개인비서' 쓴다…내달부터 원UI 7 정식 배포
-
9
공공·민간 가리지 않고 사이버공격 기승…'디도스'·'크리덴셜 스터핑' 주의
-
10
MBK, '골칫거리' 홈플러스 4조 리스부채…법정관리로 탕감 노렸나
브랜드 뉴스룸
×